절대자유를 내뿜는다…한국화단 대표작가 유근택의 조각 같은 판화들
판화만 찍으면 조각가로 변신하는 화가가 있다.
나무판에 얼굴과 풍경 등 도상을 깎고 새길 때마다 조각을 빚고 싶다는 충동이 엄습해온다. 본능처럼 목판을 후벼파고 칼질을 거듭해 구멍을 내기 일쑤다. 떨어져 나온 나무 부스러기들은 그의 눈에 아름답고 강렬한 조각의 질료들이다. 모아 붙여 꽃봉오리를, 서있는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얼굴 새기려던 목판 자리에 구멍이 뻥 뚫리자 벅찬 쾌감을 느꼈다. 화가는 되묻곤 한다. 난 나무판으로 판화를 찍는가, 조각을 만드는가.
한국화 화단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유근택(59) 작가의 판화 작업이 품은 이야기들이다. 지난 10여년간 목판화 판목 깎는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작가의 색다른 작업 결실들이 한데 모여 선보이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그의 목판화 세계를 처음으로 집중조명한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기획전 ‘유근택: 오직 한 사람’(7월21일까지)이다.
이 전시의 고갱이는 2층 ‘나무의 방’ 한가운데 있는 원형 진열장이다. 그 위에 목판을 깎은 조각들을 붙여 만든 조형물과 구멍난 목판들을 둘러 세워놓았다. 목판을 깎은 조각들을 접착시켜 기이한 입상 모양새를 만든 ‘형상’(2005)을 필두로 꽃모양으로 피어난 목판 조각들의 덩어리가 등장한다. 얼굴자리가 아예 뚫린 구멍으로 움푹 파이거나 거칠게 뜯긴 형상으로만 남은 목판들, 자신과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 주위 사람들의 모습, 숲의 나무를 새긴 여러 목판들이 판각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동그란 무대 같은 진열대 위에 도열한 얼개를 펼쳐놓고 있다.
원형 진열대 출품작은 목판을 깎아 형상을 새기는 행위 자체를 조각가의 조형작업처럼 만든 작품들이다. 깎는 과정에서 나온 나무조각과 부스러기들로 형상물을 만들거나 파내고 구멍 뚫은 판목 자체를 조각품처럼 배치한 구성이 돋보인다. 2007년작 ‘풍경’은 그해 겨울 목판의 파편을 모아 하나씩 올리니 차가운 풍경이 됐다는 자필기록을 화폭 구석에 적어놓기도 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절대자유의 조형정신을 추구해온 창작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달 30일 미술관에서 만난 유 작가는 자신의 목판 작업이 애초부터 형상을 의도하기보다 나무 물성을 건드리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기존 목판화와 달리 나무틀이 가진 물성 자체에 말을 거는 행위였음을 차츰 깨닫게 됐어요. 목판에서 나온 파편까지 작품 덩어리로 만들어낸다든가, 나무 속 구조를 파낸다든가 하는 것들이 물성에 개입하는 흔적인 거죠. 제가 목판을 파는 방식은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칼을 휘둘러 나무판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숨은 형상과 만나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선 의도적으로 한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론 즉흥 퍼포먼스 같이 새긴 겁니다.”
전시는 현재 일상의 숨은 단면들에 주목해온 그의 한국화 작업들과 목판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수십 년 동안 작업해 온 수백 점의 목판 작업들 중, 시기별로 상징적인 주요 작품을 선별해 내놓았다. 원형진열장의 목판 부스러기 조형물과 목판상들을 중심으로 자화상부터 주위 사람들의 얼굴, 풍경 등 다양한 소재로 판각한 목판화들이 펼쳐져 있다. 3층 1전시실에 마련된 2000년대 이후 성북동 작업실 시기의 주요 회화 작품과 함께 감상하면서 현대 한국화에서 동시대성의 독자적 전형을 구축한 유근택 그림세계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유 작가는 1990년대부터 한국적인 도시와 자연 풍경의 불온성을 드러내는 수묵채색 그림과 칼맛나는 인물 풍경 목판화 작업들을 병행하는 특유의 작업방식을 고수해왔다. 2003년 한겨레에 실렸던 임철우 작가의 연재소설 삽화 전회분을 모두 수작업한 목판화로 채울 만큼 애착을 보였던 그이기에 이번 전시는 유근택 작품세계의 또다른 근원인 30년 목판화 작업의 내용과 형식들을 복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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