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석의 축구 한 잔] 김판곤 감독의 새 도전, 말레이시아에 역대 가장 큰 기적이 될 동남아 최강
(베스트 일레븐=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김판곤 감독에게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도전은 아픈 상처로 남고 말았다. 차라리 과거 말레이시아 축구의 현실처럼 경쟁이 되지 않았더라면 외려 마음이 더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놀랍게도 마지막 라운드까지 최종예선행을 타진했었고, 그 마지막 경기에서 이기고도 최종예선에 오르지 못하는 비운을 맛봤다. 참고로 말레이시아의 승점은 10점인데, 한국이 속한 2차 예선 C그룹 2위 중국의 승점이 8점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내의 기대감이 커졌고, 이 기대감은 때론 김 감독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대만전 전후로 김 감독의 사임 가능성이 현지 매체로부터 언급됐다. 하필 이 6월 2연전을 앞두고 말레이시아축구협회(FAM)의 한 관계자가 대표팀 내부 상황을 정부와 언론에 폭로하는 일이 벌어져 김 감독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김 감독이 팀을 떠날 수 있다는 얘기도 이 폭로에서 나왔다.
이렇다 보니 대만전 직후 김 감독은 방송 플래시 인터뷰에서 정말 떠나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며 "난 이곳에 남고 싶다"라는 말을 세 차례나 강조해서 말했다. 현지에서 이를 지켜보며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던 풍경이었다.
말레이시아와 도전을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는 팬
김 감독은 지난 2022년 초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현장 지도자로서의 꿈과 도전을 다시 택하며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말레이시아로 향한 것이다. 김 감독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며 말레이시아와 협상에 임해 지휘봉을 잡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김 감독에게 왜 말레이시아로 올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금전적 대우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독특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팬이었다. 정확히는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울트라스 말라야'가 가장 큰 이유였다.
김 감독은 "과거 홍콩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말레이시아 원정을 온 적이 있다. 그 경기에서 울트라스 말라야를 처음 접했다. 저 역시 저런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울트라스 말라야는 어느 정도 축구 문화 수준이 오른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포터스다. 이를테면 한국의 붉은 악마, 일본의 울트라 닛폰과 같은 위상을 지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 구성원 전원이 바로 울트라스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강성 응원을 지향하다보니 일당백 전투력이 상당하며, 경기장 분위기를 순식간에 휘어잡는다.
지난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때 이 울트라스 말라야의 원정 응원이 현지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바 있으며, 김 감독은 인터뷰 때마다 이들을 언급하며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 나아가 이번 대만전을 앞두고 기자회견 상대 팀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공격 수단 중 하나로도 언급하기도 했다. 이 든든한 지지자가 뒤를 떠받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주어진 상황이 고달파도 김 감독이 다음 과제를 넘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KPG의 다음 목표는…
최종 예선 준비 과정을 감독 부임 후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꼽기도 했던 김 감독은 대만전 이후 분명히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자신이 물러난다면 말레이시아축구협회(FAM)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다음 목표를 내다봤다.
김 감독은 13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자리에서 "오는 11월에 예정된 2024 AFF 아세안(ASEAN) 챔피언십 미쓰비시 일렉트릭 컵을 준비할 것이다. 1차 목표는 4강이며, 우승도 넘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AFF 아세안 챔피언십 우승은 내가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임했던 가장 큰 이유이자 도전 과제"라며 정말 우승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참고로 이 대회는 박항서 전 베트남 감독, 신태용 인도네시아 감독 덕분에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일명 '동남아판 월드컵'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축구대회다.
태국이 역대 최다인 총 일곱 차례 정상에 오르며 동남아 지존으로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대회에서 말레이시아 축구는 2010년 대회 딱 한 번 정상에 올랐다. 준우승도 세 차례에 불과한데 이는 싱가포르(우승 4회)·베트남(우승 2회)보다 못한 성과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과 비벼볼 정도로 동남아 최강임을 자처했던 말레이시아의 지난 축구사를 떠올린다면 아세안 챔피언십에서의 성과는 너무 초라하다.
만약 김 감독이 정말 우승을 하게 된다면, 오랜 시간 동안 구겨졌던 말레이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일으켜세움과 동시에 말레이시아인들의 자긍심까지 크게 고취시킬 것이 자명하다. 이미 지난 대회에서 4강에 오른 바 있는 김 감독은 더욱 철저히 준비해 다시 한 번 준결승 고지를 밟고 그 이상을 넘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물론 여러 악재가 벌써 기다린다. 이 대회는 FIFA 매치 데이에 치러지는 대회가 아니다보니 각 클럽의 선수 차출 협조가 필요하다. AFF 아세안 챔피언십은 한국으로 치면 E-1 풋볼 챔피언십과 같은 위상을 지니는 대회인데, 적어도 동아시아권에서는 E-1 풋볼 챔피언십이 치러질 때 한중일 3개국 프로클럽들은 선수 차출에 적극 응한다. 그리고 AFF 아세안 챔피언십에 임하는 대부분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FIFA와 AFC 주관대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이 대회가 최고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의 사정만 그렇지 못하다. 일찌감치 국가대표 다수를 거느리고 있는 말레이시아 최강 조호르 다룰 탁짐의 차출 거부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팀은 이미 지난 2022년 대회에도 선수를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아 이기적이라는 평판을 대내외적으로 들은 바 있다. 이미 한 번 당한 바 있는 이 이슈는 이제 김 감독에게는 변수가 아닌 상수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김 감독은 차근차근 이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수가 없으면 길러내는 게 김 감독의 방식이다.
한편 김 감독이 속한 말레이시아는 태국·싱가포르·캄보디아·(지역 예선 동티모르·브루나이간 대결 승자)와 A그룹에서 경쟁한다. 객관적 전력상 능히 4강을 넘볼 수 있는 대진이며, 4강에 오른다면 김상식 감독의 베트남 혹은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와 대결이 예상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종종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김 감독에게 '미라클(miracle)'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만약 다가오는 AFF 아세안 챔피언십에서 4강을 넘어 우승하게 된다면, 김 감독은 지금껏 말레이시아가 경험할 수 없었던 기적을 안기게 될 것이다.
글·사진=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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