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의 ‘강한 국방’, 한반도 평화에 도움 됐을까? [정욱식 칼럼]

한겨레 2024. 6.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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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담긴 이중사고
‘한반도 평화와 강한 국방’의 엇박자 성찰해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2021년 10월 20일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2021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기념식에 FA-50 경공격기를 타고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는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국방을 바라보는 “진보 진영의 사고가 낡고 좁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도” 강한 국방이 필요한데, “진보 쪽의 담론은 굉장히 빈약했다”고 비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중사고’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중사고는 두 개의 상반된 내용이나 신념을 모두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뜻하는데, 조지 오웰의 ‘1984’에 담긴 개념이다. 그런데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내용이 딱 이에 해당한다.

문 전 대통령은 임기 초에 “재래식 전력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보고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이라는 비대칭 전력에 매달리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확한 상황 인식이자 평가다. 동시에 “강한 국방을 대화를 이끌어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위해 “강한 국방 구축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비핵화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절대조건”이라고 말하면서 대화의 목표가 비핵화에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결과는 어떨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남과 북의 세계 재래식 군사력 순위는 각각 12위와 18위였다. 퇴임한 2022년에는 6위와 32위로 그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문 전 대통령의 신념처럼 “강한 국방”을 건설한 셈이다. 또 하나의 신념이었던 남북대화와 비핵화는 어떨까? 2018년 12월을 끝으로 문재인 퇴임 때까지 공식적인 남북대화는 한 차례도 없었다. 1971년 이래 최장기간이다. 문 정부 후반기에 비핵화도 사실상 물 건너갔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의 여파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실제로 회고록에선 이 점을 십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탓만 하기엔 ‘이중사고’에 빠져 있었던 문재인 정부의 실책이 너무나도 컸다. 회고록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2018년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해였다. 하지만 문 정부의 또 하나의 신념, 즉 ‘강한 국방’에도 박차를 가한 시기였다.

정부는 2018년 연말에 책정한 2019년 국방비를 전년도보다 8.2%나 올렸다. 2008년 이후, 그리고 문 정부 임기 통틀어 최대치였다. 특히 방위력 개선비가 13.7%나 증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방개혁 2.0’에도 박차를 가했다. 핵심은 유사시 육해공에서 입체기동부대를 평양을 비롯한 “적의 종심에 신속하게 투입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문 정부 초대 국방장관이자 9·19 남북군사합의 서명자인 송영무가 이 군사전략 수립을 주도했고 문 전 대통령이 2019년 1월에 재가했다. 정부 스스로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전망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봤던 시기에 나온 조치들이다.

이중사고의 모순은 하노이 노딜 직후부터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3월에는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됐고 F-35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한 첨단무기 도입도 본격화됐다. 그러면서도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대화와 신뢰”라고 역설했다. 사달은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정상들의 판문점 번개팅 이후 벌어졌다.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두 가지 구두 합의를 했다. 트럼프가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약속하자 김정은은 북미실무대화에 나가겠다고 화답한 것이다. 하지만 8월 들어 연합훈련은 강행되었고 문 정부는 5년간 290조원이 넘는 국방비를 투입해 군비증강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삶은 소대가리 양천대소할 노릇”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를 향한 북측의 막말은 이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 정부 안팎의 인사들이 주장하는 ‘게임 체인저’가 있다. 문 전 대통령이 2017년 12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할 뜻을 밝힌 것이 전쟁위기를 딛고 ‘톱다운’ 방식의 평화프로세스를 가져온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동의 여부를 떠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한미연합훈련 ‘연기’가 김정은 정권의 전략적 판단을 바꿀 정도로 중대 변수였다면, 2019년 이후 연합훈련 ‘재개’가 평화프로세스와 남북관계에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진단에는 왜 그토록 둔감했는가?

진보가 국방에 강해져야 한다고 주문할 수는 있다. 한반도 평화와 강한 국방이 공존할 수 있다고도, 경제난에 시달리던 북이 군비경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도 말한 것처럼 남북의 군사력 격차가 벌어질수록 북이 핵과 미사일에 매달릴 가능성도 고려했어야 했다. 북이 연합훈련과 남의 군비증강에 대응해 전술핵과 단거리 발사체에 매달리는 것이 확연해졌을 때, 이중사고를 성찰했어야 했다. 국방의 수준을 넘어 유사시 무력통일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과연 국방개혁의 요체가 되어야 하는지 반문했어야 했다. 최소한 회고록에는 ‘한반도 평화와 강한 국방 사이의 모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를 같이 찾아보자’고 제안이라도 했어야 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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