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동시에 지키는 ‘시간제 정규직’ [심층기획-출생률, 유연 근무에서 답을 찾다]
네덜란드, 전일제와 차별 없어
여성 근로자 52%가 유연 근로
합계출산율 2022년 1.49명 기록
주당 35시간 이하 근로자 비율 35.1%
재택근무 비율도 2022년 기준 48.5%
전 세계 1위… 韓 4.4%보다 훨씬 높아
유급 육아휴직 9주, 불과 2년 전 도입
韓에 크게 못 미치지만 중요도 낮아
자녀 돌보며 일하는 분위기 조성 목적
11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스히폴공항 면세구역 안 편의점에서 매대를 정리 중인 닐 반 바세네어(55)는 올해 20살이 된 이란성 쌍둥이를 둔 엄마다. 아이들이 12살이 됐을 때부터 이곳으로 출근해 일한 지 올해 9년 차가 됐다. 그의 배우자는 전일제로 일하고 있지만, 닐은 1주일에 24시간, 3일만 출근하는 시간제를 택했다. 닐은 “네덜란드에서는 부부 둘 다 시간제로 일하거나 한 명이 전일제, 한 명이 시간제로 일하는 게 흔하다”고 했다.
시간제 일자리 비중이 높은 데 더해 네덜란드에서 근로자가 어디서 얼마큼 일할지를 스스로 정한다. 반면 한국에서 유연근무제는 아직 소수 대기업이나 일부 정보통신(IT) 기업만의 얘기다. 16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기업 중 74.9%가 시간선택제 등 6종류의 유연근무제 가운데 단 하나도 도입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일·가정 양립을 위해 필요한 1순위 과제도 ‘유연근로제 확산’(20.9%)이었다.
유연근무는 고용노동 분야에서 저출생을 해결할 강력한 열쇠로 거론된다.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쓰는 유럽 국가에서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은 양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네덜란드 경우 2014년까지 대체로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1.7명대였고, 2021년 1.62명, 2022년 1.49명을 기록했다. 한국은 2018년부터 1명 밑으로 떨어졌고, 2022년 0.78명, 지난해 0.72명이었다.
세계일보는 여성 정책 전문가, 고용노동부, 한국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유연근무가 보편으로 자리 잡은 네덜란드와 독일을 찾았다. 현지에서 기업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유연근무가 작동하는 원리와 그것이 일·가정 양립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재 네덜란드의 고용시장을 설명하는 건 40여년 전 이뤄진 노사정 대타협과 이후 순차적으로 안착한 제도들이다. 1982년 바세나르협약이 그 시초다. 협약 이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병’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경제가 악화했다. 노조는 높은 임금 인상률을 주장했고, 기업들은 사람을 뽑지 않아 실업률이 급증했다.
예룬 피서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SER) 연구원은 “바세나르협약은 종이 한 장짜리에 ‘임금 인상 억제’, ‘일자리 재분배’라는 딱 두 개 내용이 담겼다”며 “이를 계기로 임금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이 끊기고, 취업률이 높아지는 동시에 무엇보다 근로시간이 확 짧아졌다”고 했다.
바세나르협약 뒤 시간제 일자리를 확대하고, 유연근무를 활성화하는 제도들이 자리 잡았다. △1996년 동등대우법 △2000년 근로시간 조정법 △2015년 유연근무법이 시행됐다. 동등대우법에 따라 전일제와 시간제 근로자는 임금 등으로 차별받지 않고, 근로시간 조정법에 근거해 근로자는 근로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유연근무법에 따르면 근로자는 근로 장소에 대한 변경까지 사용자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재택근무 활용률은 2022년 기준 48.5%로 전 세계 1위다. 유럽연합(EU) 평균인 20%를 훌쩍 웃도는 수치다. 반면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재택근무 활용 근로자 수는 96만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4.4%였다. 이마저도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9만5000명(0.5%)에서 3년 새 10배 넘게 늘어난 규모다.
직원의 권리만 인정하는 건 아니다. 네덜란드의 사용자는 근로 시간 및 장소 변경을 요청하는 직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 대신 이때 근로자는 법원에 조정신청을 하면 된다. 이비 콥만 SER 연구원은 “회사가 파산 위기가 아닌 한 법원은 대체로 유연근무제를 신청한 근로자 편을 들어준다”고 밝혔다.
유연근무가 활성화된 네덜란드에서 육아휴직제도는 중요도가 떨어진다. 한국의 육아휴직제도는 1987년 생겼고, 육아휴직 급여가 지급돼 본격 운영된 건 2001년 11월부터다. 반면 네덜란드에서 유급 육아휴직제도가 생긴 건 불과 2년 전인 2022년 8월부터다. 2019년 4월 EU가 회원국에 유급 육아휴직을 최소 2개월 이상으로 보장하라고 지침을 만들면서다. 시기상으로는 한국보다 20년 뒤처진 셈이다.
네덜란드의 육아지원제도는 △출산휴가 △육아휴직 △배우자 출산휴가로 나뉜다. 자녀가 8세 이전에 쓸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은 주간 근로시간의 26배로 주당 38시간 근무 기준 26주(988시간)가 주어진다. 한국은 한 번 쓸 때 30일 이상, 2회로 나눠 쓸 수 있는 게 전부이지만 네덜란드는 육아휴직을 시간 단위로 쓸 수 있다.
육아휴직 급여액은 최초 9주만 주어지며, 액수는 일급의 70%까지이고, 만 1세까지만 지급된다. 급여액 상한액은 일급 중위소득 70%인 179.82유로(약 26만7000원)이다. 배우자 출산휴가는 출산 6개월까지 6주를 쓸 수 있다. 첫 주만 임금의 100%를 보전하고 나머지 5주는 육아휴직 급여처럼 70%를 보전한다.
네덜란드의 유급 육아휴직제도는 도입이 늦은 데 더해 기간, 액수 모두 한국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양육자를 일터로 빨리 복귀시켜 일과 육아를 병행토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같은 네덜란드 사회고용부 관계자는 “우리의 정책 목표는 워라밸(일·생활 균형)이며, 노동시장 참여와 경제적 독립이 그 안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경력 유지와 육아를 병행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강민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법제 수준에서 한국의 모성보호제도는 네덜란드랑 비교해 부족하지 않다”며 “경력 단절을 가져오는 긴 기간의 육아휴직보다는 시간제 근로와 유연근무를 활용하면서 부모가 함께 자녀를 돌보며 일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암스테르담·헤이그=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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