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파업에 항의 삭발한 엄마 “환자 지켜야 국민이 지지할 것”

안준용 기자 2024. 6. 1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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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병 딸 키우는 김정애씨의 호소
16일 충남 천안 단국대병원 병동에서 김정애(왼쪽)씨가 폐 기능 이상 등으로 입원한 23세 딸 박하은씨를 안고 있다. 남편과 사이에서 두 딸과 아들을 낳고 기른 김씨는 2001년 희소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하은씨를 넷째로 입양했다. /안준용 기자

“의사 선생님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환자 곁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정부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방조자’가 되지 마시고, 제발 환자들을 살려주세요.”

16일 오후 3시 충남 천안 단국대병원 입원 병동에서 만난 ‘하은 엄마’ 김정애(68)씨는 “딸 하은이가 많이 아팠던 지난 두 달간 우리 가족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의사들이 제발 환자 곁을 지켜달라는 뜻에서 최근 삭발까지 했다. 충남 홍성에서 가족과 함께 농장을 운영해온 그는 2001년 딸 하은씨를 입양했다. ‘코넬리아드랑게 증후군’이라는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하은씨는 지금도 3세 수준 지능에 양손은 손가락이 하나씩만 있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중증 장애를 갖고 있다.

-하은씨는 어떤 딸인가.

“지금은 30대 후반~40대가 된 딸 둘, 아들 하나를 남편과 사이에 낳아서 길렀고, 하은이는 입양한 넷째다. 2001년 폭설로 축사가 무너지고 눈앞이 깜깜할 때 기도를 통해 입양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중3 아들이 보육원 봉사를 갔다가 ‘동생이 생긴다면 아픈 동생이면 좋겠다’고 했고, 하은이와 연이 닿았다. 인큐베이터에 있던 하은이와 처음 눈이 마주치던 순간 그 맑고 천사 같던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태어날 때도, 지금도 많이 아프지만 ‘엄마 껌딱지’인 하은이 재롱을 보면서 23년을 웃으며 살 수 있었다.”

-2월부터 의사 공백이 발생했는데, 치료에 문제가 없었나.

“신문·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하은아 이제 의사 선생님 병원에 많이 안 계신다니까 아프면 안 돼’라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바로 생사의 고비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4월 15일, 폐렴으로 인한 39도 고열로 단국대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는데 한 시간 가까이 대기해야 했다. 병원 의료진은 그간 하은이를 돌봐준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지만, 응급실 앞에서 축 늘어진 아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병원이 떠나갈 정도로 ‘우리 애 시체 만들고 싶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후엔 어땠나.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2주 만에 퇴원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폐에 출혈이 생겨 호흡 곤란이 왔다. 119의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다시 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왔다. 그때는 3주간 치료를 받았다. 한쪽 폐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서 계속 위급 상황이 찾아왔다. 생사의 기로에서 몇 번이나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병원을 오가야 했다. 폐 상태가 더 나빠져 지난 5일 다시 병원에 실려와 아직 퇴원을 못 하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김정애씨가 ‘의사는 환자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제 딸 하은이를 살려주세요’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김정애씨 제공

-이번 사태 때문에 직접 피켓을 들었고, 의협 회장과 총리도 만났는데.

“너무 답답했다. TV에서 의사들이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으로 싸우겠다고 한 것을 보고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죽음 앞에 선 환자들이 이렇게 울부짖고, 가족들은 ‘이러다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영원히 헤어지면 어쩌나’ 매일 두려움 속에 사는데 생즉사 사즉생이라니... 정부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고,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피켓을 들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중대본 회의에서 “환자 단체분들은 의료계 집단 휴진 예고에 절망하고 있다. 한 어머니는 이번 일로 난생처음 삭발을 하고 피켓을 들었다. 친부모가 포기한 장애아를 입양해 인생을 바쳐 키운 분”이라며 김씨 사연을 소개했다.

-의사들은 ‘중증·응급 환자 진료는 차질 없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하은이 같은 환자도 응급실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교수님들이 한꺼번에 휴진하는 상황에서 중증·응급 환자는 괜찮을 거란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떠날 교수님들이 떠나버리고 남은 분들까지 지쳐버리면 하은이 같은 많은 환자들은 더 나빠지고, 결국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사태를 이렇게 만든 건 정부라고 하지만, 죽어가는 환자를 떠난다는데 어떻게 의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나. 환자가 죽으면 의사가 왜 필요하며, 국민이 죽으면 국가가 왜 필요한가. 의사가 환자를 지켜야 국민도 지지해 줄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에 하고 싶은 말은.

“환자들은 정부 편도, 의사 편도 아니다. 다만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 갈등은 대표자들끼리 대화로 풀고, 보통의 의사분들은 환자를 지키며 살려내는 것이 본분 아니냐.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 아픈 내 딸 하은이가 먼저 떠날지 알 수 없지만, 하은이가 이번 사태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간다면 나도 더이상 살 이유가 없다. 많은 환자 가족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돼선 안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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