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사기·일자리 불안… 무대에 오른 팍팍한 청년의 삶

이태훈 기자 2024. 6. 1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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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년 고민 담은 젊은 공연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극단 신세계 김수정 대표의 실제 전세 사기 경험담을 녹인 연극 '부동산 오브 슈퍼맨'. /극단 신세계

초능력 슈퍼맨도 전세 사기는 피하지 못한다. 게임 프로그래머를 꿈꾸던 청년은 4대 보험도 없는 배달 라이더가 돼 목숨을 담보 삼아 달린다. 대학 진학을 앞둔 다이빙 선수 여고생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물에 뛰어들 수가 없다.

이달 말까지 대학로 일대 극장에서 진행 중인 올해 서울연극제에선 지금 여기 젊은이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연극들이 눈길을 끈다. 연극제 공식 선정작 중 ‘부동산 오브 슈퍼맨’은 청년 주거 불안을, ‘자본 3: 데이터와 플랫폼’은 플랫폼 경제 시대 일자리 문제를, ‘다이빙 보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동시대의 희로애락을 비추는 건 연극이 가진 근원적 힘. 젊은 연극인들이 자기 세대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의외로 드물어서 더 귀한 시도다.

그래픽=송윤혜

◇전세 사기 당한 슈퍼맨 “이게 웃겨요?”

초능력 피해가 속출하자 영웅들의 능력 사용이 법으로 금지된 지 10여 년, ‘슈퍼맨’(이강호)은 음식 배달에 대리기사 뛰며 대출받고 배트맨 돈까지 빌려 신축 빌라 전셋집을 마련했다. 분양 사무소 직원과 계약할 때 공인중개사 사무소는 ‘신축은 원래 다 그렇다’며 걱정 말라더니. 집값보다 전세가 비싼 ‘깡통 전세’에 미납 세금, 근저당 줄줄이 매달린 전세 사기였다.

실제 전세 사기 피해자인 극단 신세계 대표 김수정 연출가는 피눈물 나는 자기 경험을 극 속에 그대로 녹였다. 등기부등본 다 확인했지만 집주인이 서류를 위조해 근저당을 말소할 수 있는 제도 허점까진 피할 수 없고, 내 집 마련 꿈과 법 제도의 허점을 악용하는 분양 사기단의 치밀한 전술 앞에 청년들은 속수무책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슈퍼맨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지난해 말까지 전세 사기 피해자는 국토부가 인정한 것만 1만명이 넘고, 그중 70% 이상이 20~30대. 극단적 선택이 속출하는데, 정치권은 ‘개인 간 사기 범죄에 왜 혈세를 낭비하느냐. 보이스피싱, 코인 사기도 국가가 배상하느냐’며 요지부동이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난다.

극의 막바지, 노래하고 춤도 춰보지만 끝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슈퍼맨은 “이게 재밌으세요?” 물으며 오열한다. 관객은 ‘어수룩해서 당한 거’라고 비웃거나 ‘내가 안 당해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에두르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향해 직진하는 건 장애인학교 설립 다툼을 그린 ‘생활풍경’ 등 작품에서 첨예한 갈등도 유머러스하게 무대 위에 소화해온 극단 신세계의 강점. 청년의 고통을 자신들의 언어로 토해내는 공감의 힘이 놀랍다.

◇”프로그래머 되고 싶으면 대학 가”

'자본3: 플랫폼과 데이터'에서 플랫폼 기업의 배달 라이더 '리키'(정유미)는 라이더들을 데이터 취급하는 플랫폼의 인공지능(AI)과 배달 대결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부당한 현실을 알려 보려 애쓴다. /드림플레이 테제21

‘자본3: 플랫폼과 데이터’의 중심 인물은 게임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마이스터고에 갔던 ‘늘찬’(김세환). 교사는 매몰차게 “게임 회사에서 프로그래밍하고 싶으면 대학 가라”고 말하고, 졸업 학기 현장 실습으로 소시지 공장에서 종일 포장만 하다 뛰쳐나온 그는 결국 목숨 걸고 달려야 겨우 기름값·보험료 내기 십상인 ‘배달 라이더’가 된다. “돈 많이 벌어서 실리콘밸리에 PC방 차릴 거예요!” 플랫폼 기업의 인공지능은 라이더를 인간이 아니라 데이터 취급하고, 아무리 배달 스쿠터를 달려도 꿈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실 공개 자료에 따르면,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청년들은 2022년 산재 승인 건수가 1837건으로 1위, 쿠팡과 물류 자회사들은 2위(1464건)였다. 한예종 연극원 김재엽 교수가 김세환, 이소영, 정유미 등 각광받는 젊은 배우들과 함께 만든 연극.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보니 오히려 서사 개연성에 아쉬움이 생기고, 뒤로 갈수록 좋은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쪽으로 흐르는 점은 아쉽다.

◇”망설이지 마, 그냥 뛰어내리면 돼”

극단 사개탐사의 2024년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다이빙 보드'. 6살 때부터 다이빙을 해온 '애니'는 대학 진학을 위해 꼭 필요한 다이빙 대회 예선을 앞두고 갑자기 '얼굴 없는 남자들'의 형체를 보기 시작하고, 더 이상 물에 뛰어들 수 없게 된다. /서울연극협회·양동민 작가

개막 전부터 전석 매진되며 화제를 모은 극단 사개탐사의 ‘다이빙보드’는 청춘의 한 시절을 통과하며 누구나 경험하는 알 수 없는 미래, 일상을 잠식하는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 6세 때부터 다이빙을 해온 ‘애니’(신윤지)는 대학 진학을 위해 꼭 좋은 성과가 필요한 다이빙 대회 주 예선을 앞두고 갑자기 다이빙 풀의 물 위에서 ‘얼굴 없는 남자’의 형체를 보고, 더 이상 물에 뛰어들 수 없게 된다. 설상가상 이 형체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한다.

청춘은 모든 게 미숙한 채로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 자신이 뭘 가장 좋아하는지, 뭐가 자신에게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도 많다. ‘얼굴 없는 남자들’로 실체화해 유령처럼 주변을 맴돌던 것들이 자신 안의 두려움인 걸 깨달으면서, 마음의 키는 한 뼘 더 자라난다. “죽지 마. 넘어져도 돼. 망설이지 마. 어떤 건 끝나고 어떤 건 시작되지. 그냥 뛰어내리면 돼.” 극의 막바지, 다시 용기를 내 물에 뛰어들 때 ‘애니’의 독백이 오래 가슴을 울린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23일까지, 전석 4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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