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박정희 망각하는 서울대 관악캠퍼스 50주년 [조선칼럼 전상인]
근대국가는 곧 지식국가
서울대 종합캠퍼스 탄생은
경부고속·포항제철 버금
관악캠퍼스 산파는 박 대통령
그를 기념하는 어떤 상징도 없어
야박한 인정·부박한 세태
정치적 호불호 떠나 기념해야
역사적 기념일을 매년 기리기도 하지만 5년, 10년 단위로 ‘꺾어’ 평소보다 성대하게 치르는 것 또한 나름 관례다. 50년이나 100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내년인 2025년에 서울대학교는 관악캠퍼스에서 새출발한 지 반백 년을 맞는다. 그런데 어디서도 이를 각별히 여기려는 조짐이 없다. 1946년에 출범한 서울대는 이를 기준으로 해마다 개교기념 행사를 치르며, 매 10년 차마다 규모가 약간 커지는 정도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사실상 산파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인 서울대는 경성제대의 후신 경성대학과 10개의 관·공립 전문학교를 합친 것으로, 캠퍼스가 서울 및 경기도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한국전쟁 때 엄청난 물리적 피해까지 입게 되자 1950년대 후반부터 대학 조직 및 공간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학내 의견 충돌과 부지 확보 난항, 예산 부족 탓에 서울대 종합화 계획은 오랫동안 표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서울대 종합캠퍼스안(案)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서울대 종합화 10개년 계획’으로 가시화되었다.
박 대통령은 서울대 종합캠퍼스 조성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인식했다. 무엇보다 당시는 ‘조국 근대화’의 시대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근대국가의 또 다른 이름은 ‘지식 국가’다. 아는 게 힘이고 지식이 국력이라는 의미다. 비록 대학의 최초 출현은 중세까지 소급되나 대학다운 대학의 발전은 근대국가 건설 및 부국강병과 긴밀히 연계되어왔다. 박 대통령이 “서울대를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보다 장기적이고 큰 규모의 계획”을 주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비슷한 시기 한국과학원(KAIS, 카이스트 전신)의 태동도 배경은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서울대 종합캠퍼스의 탄생은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에 버금가는 역사적 이정표로 평가받을 수 있다.
위치를 관악산 기슭으로 최종 낙점한 것도 박 대통령이었다. 당시 최문환 총장에게 보낸 친서에 “야음(夜陰)에도 돌아보고 해를 넘기며 숙고 끝에 결정”했다고 적었다. 서울대의 관악산행(行)은 그 무렵 정부의 강남 개발 정책에 부응하면서 기존 관악컨트리클럽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경성제대 시절 일본식 캠퍼스 모델에서 벗어나 미국식 대학 스케일로 전환하는 데도 광활한 관악산 일대가 제격이었다. 실제로 서울대 이전은 캠퍼스 플랜과 도시계획의 결합이었다. 대학 구성원들의 학업과 일상생활이 함께 가능한 대학도시 개념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서울대 관악캠퍼스 건설에는 때마침 물이 오르기 시작한 서울시의 도시계획 역량이 십분 동원되었다.
박 대통령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조성과 관련하여 세심하게 신경 썼다.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했고 지역주민의 이용을 배려했으며 기본적으로 ‘차 없는 캠퍼스’를 구상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관악캠퍼스 기공식에 직접 참석하여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훗날 시인이 된 국문과 학생 정희성은 식장에서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축시를 낭독했다. 데모 진압을 위해 학교를 관악산으로 몰아넣는다는 ‘가짜 뉴스’ 속에서도 서울대 관악캠퍼스는 마침내 위용을 드러냈고, 1975년부터는 대부분 그곳에서 신입생을 받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서울대 구성원들로부터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63년 서울대 졸업식장에 군복 차림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기 시작한 그는 1974년 동숭동 대학 본부 시절 마지막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정치적인 반대 표시로 일제히 뒤돌아 앉는 모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서울대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던지, 1976년 개교 30주년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휘호를 썼고 1978년에는 관악캠퍼스를 조용히 둘러본 적도 있다. 어쨌든 박 대통령 주도로 국내 최대의 종합캠퍼스가 만들어진 이후 서울대는 대한민국 최고의 세계적 명문 대학으로 웅비하게 되었다. 한편, 극심한 난개발 현장이 되어버린 오늘날 관악캠퍼스를 보면 그의 사후 빈자리를 느끼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현재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박 대통령의 행적을 상기하는 어떠한 기념 시설도 없다는 점이다. 개발 연대에 서울대에는 그의 특명으로 세워진 학과가 많았다. 대통령 내외로부터 물심양면 지원받은 졸업생도 비일비재고 그중에는 훗날 고관대작이 된 인물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서울대에서 박 대통령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어있다. 야박한 인정과 부박한 세태가 연출하는 의도적 망각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이 사안만큼은 그에 대한 정치적 호불호와 상관없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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