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미국 대선과 바이브세션
선거철마다 소환되는 전설적인 캐치프레이즈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올해 미국 대선 판세를 설명하기에도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미 CBS방송과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 5~7일(현지시간) 유권자 2063명에게 벌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경제(88%)와 인플레이션(75%)을 가장 중요한 대선 이슈로 꼽았다. 경제와 인플레이션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지지율을 갉아먹는 의제이기도 하다.
바이든 대통령 재임 기간 미국의 연간 물가 상승률은 평균 5.5%로, 지난 20년 평균(2.1%)보다 높았다.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유동성을 풀고 정부가 집집마다 재난지원금을 꽂아준 결과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에너지·원자재 등의 글로벌 공급망이 교란된 것도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팬데믹과 전쟁이 거의 모든 국가의 물가를 올려놨다. 뉴욕타임스가 쓴 것처럼 “물가 상승은 바이든의 잘못이 아니었다”.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바이든 행정부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난 미국 경제는 강했다.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제로금리였던 기준금리를 2022~2023년 1년 남짓한 기간에 5.50%까지 올렸지만 경제는 망가지지 않았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과 나스닥 등 미 증시를 대표하는 주가지수들은 사상 최고치를 밥 먹듯이 경신하고 있다. 고용시장도 견조하다. 미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5월 비농업 부문 고용은 27만2000명 증가한 것으로 집계돼 전문가 예상치 19만명을 크게 웃돌았다. 5월 실업률은 시장 예상치(3.9%)보다 높은 4.0%로 나왔지만, 여전히 역대 최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연준은 지난 12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최근 지표를 보면 경제활동은 굳건한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 유권자들은 경제가 엉망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지난달 22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 응답자의 56%는 미국이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고 답했고, 49%는 S&P 지수가 올해 들어 하락했다고 생각했다. 49%는 실업률이 50년 만에 최고 수준이라고 믿었고, 72%는 물가 상승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지난해 하반기 3%대로 떨어졌고 올해도 3%대 초중반에서 등락하고 있다.
경제지표와 유권자들의 인식 불일치 현상이 벌어지자 ‘바이브세션(vibecession)’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경제 저술가 카일라 스캔런이 2022년 고안한 이 단어는 분위기를 나타내는 ‘바이브’와 경기침체를 뜻하는 ‘리세션’의 합성어로, 경제지표는 좋은데 사람들은 경기가 나쁘다고 느끼는 현상을 가리킨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바이브세션은 바이든 캠프가 ‘사실 우리 경제는 상당히 좋다’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하는 이유다. 유권자들이 ‘내가 경기가 안 좋다고 느낀다는데 왜 당신들이 내 경험을 무시하느냐’고 되레 반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선은 다가오는데 지지율은 오르지 않자 민주당에선 경제에 관해 더 공격적인 메시지를 내놓아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인사들은 기업의 탐욕 때문에 물가가 오른다는 뜻의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구호를 바이든 대통령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길 바란다. 물가 상승의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자는 전략이다.
유권자들의 경제 인식이 미약하게나마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도 있다. 지난 9일 파이낸셜타임스와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이 공동 조사·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바이든의 경제 정책이 경제에 많이 또는 다소 도움이 됐다’는 응답률은 지난해 11월 26%에서 이달 32%로 상승했다. 하지만 대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엔 아직 부족한 수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는 칼럼에서 “바이든 캠프는 경제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고 진단하며 “(경제가 좋다는) 사실 그대로를 유권자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경기가 나쁠 땐 나빠서, 좋을 땐 좋아서 유권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대선에서 바이브세션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1992년 미 대선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구호를 앞세워 공화당을 꺾었다. 바이든 캠프가 문제는 경제임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바보가 되지 않길 바란다.
최희진 국제부장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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