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ILO 의장국의 ‘드림 시나리오’
세상에 우연은 많다. B급 영화에 다수 출연하며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니컬러스 케이지가 다시 한번 저력을 발휘한 영화 <드림 시나리오>는 우연이 어떻게 필연으로 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 폴은 한 대학의 종신 교수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연구 업적도 교육 역량도 보여주지 못하는 이른바 ‘찌질한’ 교수다. 그런 그가 불특정 다수의 꿈에 나타나 셀럽이 되고 이를 향유하기 바쁘다. 노력하지 않고 얻은 유명세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현실로 바꾸려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속에서 방관자였던 그가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범죄자로 돌변하면서 현실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범죄자 돌변까지 우연으로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범죄자로 변한 것은 셀럽이 된 이후 그가 취한 행동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고 한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작용하는 선거와 정쟁을 은유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지난 15일 한국이 국제노동기구(ILO) 의장국이 된 것도 유사하다. 지역별로 안배되는 의장국의 차례가 된 것은 필연에 속하지만, 그것이 현 정권과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에 가깝다. 심지어 주 69시간제를 시도하고 카르텔 운운하며 노동조합을 탄압한 현 정권이 국제노동기구 의장국이 된 것은 아이러니한 우연이다.
<드림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폴은 ‘이래 봬도 내가 종신 교수인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종신 교수임을 내세워 잘못을 덮으려 하거나 왜곡해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설마 종신 교수인데, 그럴 리가.’ 윤 대통령이 ‘이래 봬도 내가 대통령인데’ 하듯이 현 정부도 ‘이래 봬도 ILO 의장국 정부인데’라고 말할 것 같다. 한국의 노동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설마 ILO 의장국인데.’
지난 11일 의장국 단독 후보 통보를 받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윤석열 정부 들어서 추진한 노동기본권 신장, 약자 보호와 사회적 대화, 노동 개혁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라고 자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제노동권지수는 2014년 처음 발표된 이후 11년 연속 최하위인 5등급이다. 국제노동권지수는 국제노총(ITUC)이 정부와 사용자의 ILO 기본협약 위반 사례를 조사해 169개국을 5개 등급으로 분류한 것이다. 5등급은 노동권이 법·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수준이라는 의미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 첫해부터 화물노동자 대규모 파업과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사내하청지회 파업에 강경 대응해 갈등을 빚었다. 지난해에는 건설노조를 ‘건폭(건설폭력배)’으로 몰아 대규모 구속과 수사에 나서서 정권 퇴진운동까지 촉발했다. 이뿐만 아니라 노조회계 공시와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갈등 등으로 노정관계가 경색됐다. 포스코 하청노동자 교섭을 지원하던 김준영 금속노련 위원장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구속해 한국노총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ILO의 요구와 권고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ILO는 지난해 11월 우리나라에 ‘결사의 자유’ 협약 87호와 단체교섭권 관련 부당노동행위를 규정한 98호 협약에 대한 이행 검토를 요구했다. ILO 협약·권고 적용 관련 전문가위원회도 지난 3월 ‘노조는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경우 결산 결과와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한 노조법 27조와 관련해 법안을 재검토하고 재정 점검이 노조 운영에 개입하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또한 지난해 11월 노조법 2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해 ILO가 환영의 뜻을 밝혔음에도, 한 달 뒤인 12월 윤석열 대통령은 이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ILO 의장국 선출은 한국과 우리 노동자들에게 ‘드림 시나리오’가 될 것이란 우려가 들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은 “지나치게 의미를 부풀리는 것은 볼썽사납다”고 논평하며, “의장국 위상과 명예에 부끄러운 수준이 아닌지 돌아보고 노동기본권을 바로 세우라”고 촉구했다. 민주노총도 관례적 선출이라고 지적하며, “노동 약자와 미래 세대를 위한다는 말로 도리어 노조를 탄압하는 이중적 행태를 멈춰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에서는 우연은 필연으로 이어지고 필연은 결과를 낳는다. ‘드림 시나리오’가 악몽과 몰락으로 끝날지 성찰과 희망의 해피엔드를 맞을지는 우연의 주인공에 달려 있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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