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청탁금지법과 에코백

기자 2024. 6. 1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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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위, 신고자에 이유 통지 않고
김건희 여사 ‘명품백 의혹’ 종결
공직자 배우자 제재 규정 없다며
권력 눈치 살펴 부패의 길 열어줘

2016년 1월, 한 출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이 곧 나오는데, 이 책의 출간 기념 북토크 사회를 맡아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당시 정의에 관한 책을 쓰는 중이었고, 김 전 대법관이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재직 당시 입안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을 한 꼭지로 다루고 있던 터라 요청을 수락했다.

‘청탁금지법’은 입법 과정 내내 이런저런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철학 전공자의 눈으로 볼 때, 이 비판들은 매우 놀라웠다. 이 비판들이 현대 정의론에서 쓰는 판단의 잣대인 효용, 권리, 미덕이란 세 가지 모두에서 쏟아져 나온,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았기 때문이다.

효용의 차원에서, 당시 정계와 경제계에서는 이 법안이 비싼 선물세트를 팔지 못하도록 만들어 농수축산업계가 큰 피해를 볼 것이라 주장했다. 더불어 농수축산물 유통업계도, 접대에 유용한 골프장과 음식업계 역시 손해를 입을 거라 우려했다.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매년 11조6000억원씩 경제적 손실을 볼 거란 예측까지 나왔다.

권리에 입각한 주장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이 법안이 헌법상의 평등권(제11조 1항)을 위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제21조)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심판까지 청구했다. 이들은 “공공적 성격이 강한 금융·의료·법률 등의 민간 영역은 제외하고 언론과 교육 영역에 대해서만 규제해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공직자 등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인데도, 언론인도 포함되어 있어 민간 영역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염려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미덕을 내세워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선물을 권하는 게 우리 미풍양속이라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접대상한선인 ‘식사 3만원, 선물 10만원, 경조사비 10만원’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당시 한 국회의원은 선물 한도를 10만원으로 하면, “갈빗살 10만원에 포장비용 4000원, 택배비 4000원 하면 벌써 10만8000원”이라는 예를 들었다. 심지어 돌반지 등을 선물하는 우리 풍습이 억제될 거란 주장까지 나왔다.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청탁을 금지하는 법이 사회를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김영란법’으로 불리던 이 법안은 소위 정의의 이름으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출판사의 요청이 왔을 때 ‘우리 사회에서 이런 법을 꿋꿋하게 입안한 이는 누굴까’ 궁금했고,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출판기념회 몇달 이후, 이때 맺은 작은 인연 덕분에 당시 출연하고 있던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저자를 초대할 수 있었다. 녹음이 끝난 시점이 저녁 무렵이라 저녁 식사를 권했다. 김 전 위원장은 한결같이 거절했다. 간곡히 말씀드려 김 전 위원장이 우리와 나눈 저녁은 9000원짜리 메밀국수 한 그릇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가 뭐 먹는지 지켜보는 것 같아요.” 식사 자리에서 김 전 위원장이 작게 미소지으며 한 말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부패를 방지하는 법안의 입안자로서 감당할 일상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그날 예의를 다하고 싶어 모신 식사 자리가 미안해졌다. 그해 여름, 헌법재판소가 이 법의 핵심쟁점에 대해 모두 합헌 판결을 내렸고 가을이 되어 법이 시행되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까닭은, 국민권익위원회가 내린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한 조사결과 때문이다. 권익위가 신고자인 참여연대에 보낸 공식 통지서엔 “귀하께서 우리 위원회에 제출하신 ‘공직자와 그 배우자 등의 청탁금지법 위반의혹’ 신고 사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4조 1항에 따라 ‘종결’했음을 알려드린다”는 구절만 있다. 신고가 종결된 이유가 아예 없다.

공식통지서에 없는 권익위의 변명은 ‘공직자 배우자는 제재 규정이 없다’ ‘선물이 대통령 직무와 관련성이 없다’ ‘직무 관련성이 있건 없건 신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권익위가 공신력 있는 기관의 해석을 통해 모든 공직자에게 간접적으로 청탁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준 셈이다.

이처럼 누군가는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부패를 막기 위해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 그릇을 조심하며 싸운다. 하지만 누군가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부패의 길을 열어준다.

권익위가 열어준 그 길 위로, 김 여사는 청탁금지법을 뒤로한 채 에코백을 들고 해외 순방에 올랐다.

김만권 정치철학자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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