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상이 ‘남우주현상’이 됐을 때
팔이 욱신거렸다. 참아보려 했지만 계속 아팠다. 야수가 쓰는 근육과 투수가 쓰는 근육은 다르다. 아마추어 때는 두 포지션 모두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프로는 달랐다. 처음 아팠을 때 3개월 정도 재활했다. 팔 상태가 괜찮아져서 던지려 하면 다시금 아파왔다. 지루한 재활의 시간이 다시 이어졌다. 그런 과정을 3번이나 반복해서 겪었다. 주현상(한화 이글스)은 그때가 “야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돌아갈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던 때였다. 결국, 그는 이겨냈다. 그때가 2020년이다. 그해 8월부터 퓨처스(2군) 리그에 나갔다. ‘이제 진짜 투수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군 제대 뒤 28살에 ‘야수’에서 ‘투수’로
주현상은 2015년 신인드래프트 때 2차 7라운드 64순위로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당시 계약금은 5천만원이었다. 데뷔 첫해 103 경기에 출전해 타율 0.210(214타수 45안타), 2도루, 12타점을 기록했다. 주로 3루수로 나섰는데 수비로는 합격점을 받았다. 2016년에는 백업으로 밀리면서 15 경기(8타수 2안타)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주로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나섰다. 두 시즌 동안 ‘타자 주현상’의 성적은 타율 0.212(222타수 47안타) 12타점이었다.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주현상은 이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했다. 제대 뒤 다시 팀으로 돌아왔을 때는 내야 경쟁이 한층 치열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자리가 생길 것도 같았다. 이때 당시 한화 투수코치였던 정민태 현 삼성 라이온즈 코치가 그에게 투수 전향을 권유했다. 그의 나이, 야구 선수로는 승부를 봐야 하는 28살이었다. 주현상은 “군대에서 전역하고 원래대로 야수로 준비해왔고, 힘이 붙은 상태로 다시 한번 야수로 도전해보고 싶었다”면서도 “내 나이를 생각하면 투수 전향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투수 포지션에 도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마운드 위에서의 경험치가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현상은 “동아대 시절에 팀에 투수가 많이 없어서 감독이 경기 후반에 던질 수 있겠냐고 물었고 8~9회 이기고 있을 때는 투수로도 몇 번 마운드에 올랐다”며 “공 던지는 데는 늘 자신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청주고 시절에는 비공식적으로 최고 시속 147㎞의 공을 던지기도 했던 그였다. 다만 투수로는 키(177㎝)가 작아서 내야수를 했다.
2021년 4월7일 인천 에스에스지(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SSG 랜더스와의 방문경기. 주현상은 팀이 13-0으로 앞선 7회말 1사 1루에서 프로 투수 데뷔전을 했다. 첫 상대는 메이저리그에서 국내로 돌아온 추신수였다. 주현상은 추신수를 중견수 뜬공으로 돌려세웠다. 주현상의 이날 경기 성적은 1⅔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주현상은 그렇게 투수로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홈런을 맞을지언정 출루는 없다
2021시즌(2승2패 4홀드 평균자책점 3.58)에 성공적으로 투수 신고식을 마친 주현상은 2022시즌(1패 1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6.83) 잠시 주춤했으나 2023시즌 한화의 철벽 필승조로 자리잡았다. 55경기에 출전해 2승2패 12홀드 평균자책점 1.96(59⅔이닝 13자책점)의 괄목할 만한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2024시즌 그는 팀 마무리였던 박상원이 부진하면서 팀 소방수 역할을 맡게 됐다. 사실 최원호 전 한화 감독은 시즌 초부터 주현상을 마무리로 쓰고 싶었는데 ‘전관예우’로 박상원을 먼저 소방수로 기용했었다.
팀 사정상 주현상은 세이브를 올릴 기회가 많지 않았다. 2024년 6월10일 현재 28경기에 등판했는데 6세이브에 불과하다. 대신 승(4승)이 많다. 평균자책점은 1점대(1.71)다. 세이브 부문 공동 1위(18세이브) 오승환(삼성 라이온즈·1.86), 2위 정해영(KIA 타이거즈·2.33)보다도 평균자책점이 낮다.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은 0.79다. 홈런을 맞을지언정 주자를 출루시키지 않는다.
주현상의 최대 강점은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다. 타자와 대결할 때 거침없이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공을 꽂아 넣는다. 피하는 것 없이 아주 공격적인데, 야수 때 경험 때문이다. 주현상은 “야수였을 때 수비를 많이 나가서 수비 시간이 길어지면 공격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안다. 야수에게 최대한 수비 시간을 짧게 해주고 싶어서 공격적으로 던지는 것 같다”며 “볼넷을 주는 게 제일 싫다”고 했다.
주현상은 마무리가 되면서 야구의 짜릿함을 더 느낀다. 경기를 매조진 다음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주현상!” “주현상!” 함성이 너무 좋다. 주현상은 “팬들이 내 이름을 외쳐줄 때 진짜 야구 하기를 잘했구나 싶다. 엄청 뿌듯한 순간”이라고 했다. 물론 가족들은 경기 승패의 갈림길에서 등판하는 탓에 “걱정 반, 긴장 반으로 경기를 지켜보지만” 말이다.
한화 팬들은 이제 주현상을 ‘남우주현상’으로 부른다. 야구에서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자주 나오고 드라마 엔딩을 바꾸는 중심에는 대개 마무리 투수가 있다. 야수였을 때 그는 조연급이었다. 하지만 서른 즈음에 내린 큰 결단으로 그는 이제 주연급으로 우뚝 섰다. 맨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패전조였고, 다음은 추격조였으며, 그다음은 필승조였다.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며 일궈낸 것이 팀 마지막 보루, 마무리의 위치다.
프로야구에서 타자가 투수로, 투수가 타자로 전향하는 일은 꽤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투타 겸업을 하기 때문에 각각의 포지션이 낯설지 않다. 롯데 자이언츠 나균안 또한 야수로 3시즌을 뛴 뒤 투수로 바꿔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하재훈은 2019년 에스케이(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마무리 투수로 구원 1위(36세이브)에 오른 적도 있으나 2022년부터 타자로 다시 활약하고 있다. 계약금 9억원을 받고 키움 히어로즈에 입단한 장재영은 3년간(2021~2023년) 투수로만 뛰다가 지난 5월 중순부터 타자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시속 150㎞ 이상의 공을 뿌렸으나 늘 제구가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방망이 솜씨도 좋았기 때문에 타자로의 변신에 용기를 얻고 있다.
버릴 수 없으면 얻을 수도 없는 법
‘프로’라는 이름을 안겨준 타격 기술을, 투구 기술을 버리는 결정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0’의 위치에서 다시 시작하고 경쟁해야 하는 것만치 두려운 것 또한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버릴 수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 손에 쥔 것을 놔야만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새로운 것을 택했을 때 꽉 움켜쥘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롯이 선택자의 몫이다. 삶의 주연과 조연은 거기서 갈린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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