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혼종의 도시, 베를린 보름 살기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6. 1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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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저항, 다문화와 혼종의 도시 정체성이 응축된 베를린 글라이스드라이에크 공원. 사진 아틀리에 로이들(Loidl)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암스테르담발 서울행 표만 예약한 채 파리에 내렸다. 내가 나에게 선물한 한 달의 시간. 다음은 어느 도시인지, 내일은 무얼 할지 계획하지 않은 여행. 가장 독일적이지 않은 독일 도시 베를린에서 보름을 보냈다.

오래 머물며 만난 베를린은 사례 답사를 위해 바삐 훑으며 다녔던 그 도시가 아니었다. 나를 받아준 지인의 거처는 오래된 주거지 한가운데 있었다. 덕분에 키츠(Kiez)라는 베를린 고유의 공간 문화를 매일 경험했다. 키츠는 ‘꼬마 동네’를 뜻하는데, 소규모 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 안에 식품점, 빵집, 카페, 식당, 술집, 꽃가게, 빈티지 옷가게, 책방, 갤러리, 놀이터가 골고루 있어 일상의 의식주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늦은 밤까지 주민들로 북적인다. 키츠를 벗어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동네가 지루하면 목적 없이 다른 동네의 거리와 골목을 걷다 이름 없는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베를린의 속살이 조금씩 보였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매혹적 표현(보베라이트 전 시장)이나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도시”라는 여행객들의 환호 이면에서 벌어진 젠트리피케이션과 양극화 현상도 눈에 들어왔다. 역시 도시는 책으로 읽을 수 없다. 발로 읽어야 도시가 보인다.

느릿하게 걷다 앉아 만난 공원들의 풍경은 출장길 답사 때와 달랐다. 왕실 사냥터에서 대형 공원으로 전환된 도시 중앙의 티르가르텐, 폐쇄된 공항 부지를 전유해 공원처럼 쓰는 템펠호프, 장벽을 허문 자리에 만든 마우어 공원 같은 단골 사례 답사장소도 달리 보였다. 뛰는 속도로 사진만 찍으며 다니던 때와 다르게 공원의 사람들로 눈과 마음이 향했다. 그들에게 공원은 대도시의 고단한 삶을 달래는 고요한 안식처 그 이상이었다. 공원은 베를린 특유의 자유와 저항, 다문화와 혼종성을 넉넉히 받아내고 다시 내뿜는 역동의 장소였다.

한적한 호숫가 동네공원에 누워 낮잠에 빠졌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우다. 베를린 리첸제 공원. 사진 배정한

머문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 나는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공원에서 낮잠 자기.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 쓰면서 다룬 소재 대부분이 공원이지만 내 몸으로 감각하며 공원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었다. 형태와 구조를 살피거나 의미를 캐묻기 급급했다. 옛 보트하우스와 한적한 호수를 끼고 있는 소박한 공원에서 베를리너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그들처럼 반쯤 벗고 풀밭 일광욕을 감행할 용기는 없어 긴 벤치에 몸을 뉘었다. 투명한 공기와 바삭한 바람이 긴 잠을 선물했다.

어설픈 ‘베를린 보름 살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글라이스드라이에크(Gleisdreieck) 공원이다. 재독 조경학자 고정희 박사의 동행 덕분에 베를린 남북 녹지축의 고리 역할을 하는 면적 31헥타르의 대형 공원 답사가 고단하지 않았다. 글라이스드라이에크는 원래 화물역과 철로였다. 2차 대전 이후 역이 폐쇄되고 방치되면서 폐허로 변모했다. 고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철로 이루어진 세상의 심장을 다시 자연이 정복”한 것. 413종의 식물, 112종의 나비, 10종의 포유류가 서식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도시 자연의 기적”이라며 온 베를린이 들썩였다고 한다. 베를린시는 고속도로 건설을 계속 밀어붙였으나 시민들은 땅을 점령하고 다양한 녹색 행동을 전개하는 격렬한 투쟁으로 맞섰다. 통일 이후 포츠다머플라츠 개발로 많은 녹지가 잠식되자 이 철도 부지에 공원을 조성해 벌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시민 참여로 지켜내고 만든 글라이스드라이에크 공원. 베를린 남북 녹지축의 연결 고리다. 사진 아틀리에 로이들

시민 참여에 기반한 오랜 설계 과정 끝에 베를린 남북 녹지축의 고리 역할을 하면서 역사적 흔적과 생태적 다양성을 다층의 풍경으로 품어내는 공원이 완성됐다. 험난한 공원화 과정은 공간 정치에 대한 “시민 참여의 역사 그 자체이자 베를린 녹색당 결성의 씨앗”이라는 게 고정희 박사의 평가다. ‘두 가지 속도의 공원: 빠르게 달리기, 느리게 휴식하기’ 개념이 세련된 디자인을 통해 구현됐다. 잡석밭 위에 방치하듯 심은 나무들은 이제 큰 숲을 이뤘다. 대규모 스케이트 필드와 시원하게 연결된 자전거 길, 곳곳의 넓은 초원과 운동장에 발 디딜 틈이 없다. 공원에 이렇게 사람이 많아도 괜찮은 걸까. 온갖 언어가 뒤섞여 공명한다.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행위를 허용하는 이 공원에는 자유와 혼종으로 대표되는 베를린의 도시 정체성이 응축되어 있다.

공원 끝자락이 보일 무렵 우리 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인기 있는 한 수제 맥주 브랜드의 양조장과 야외 테이블을 가득 메운 인파. 호숫가 공원 벤치에 누워 낮잠에 빠진 건 글라이스드라이에크에서 맥주를 맘껏 들이켠 오후 그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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