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판수 “50년 전 감옥서 정의 꿈꾸며 만든 노래 지금도 유효”

강성만 기자 2024. 6. 16. 17: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공동이사장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공동이사장이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재단 사무실에서 다음달 4일 열리는 공연을 앞두고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김판수 노래전 ‘키다리 아저씨’’.

내달 4일 오후 6시 200석 규모인 서울 마포구 구름아래소극장에서 열리는 노래 공연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간첩 조작 사건인 일명 ‘유럽 간첩단 사건’(1969년)에 휘말려 약 5년 옥고를 치른 김판수(81·㈜호진플라텍 대표이사) 익천문화재단 공동이사장이 옥중에서 만든 노래 10곡을 노래패 꽃다지, ‘반전반핵가’를 만든 박치음 순천대 교수 등과 함께 부른다.

그는 석방 6년 뒤인 1979년에 1인 기업 ㈜호진실업을 창업해 현재 연 매출 200억원 규모인 도금약품 제조회사 ㈜호진플라텍으로 발전시켰다. 직원이 50명인 이 회사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도금 약품을 가장 먼저 국산화했고 에스케이하이닉스가 현재 양산 중인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적용 가능한 도금 약품과 기술을 국내업체 최초로 승인받았다.

3년 전에는 평생의 길동무인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와 함께 재단법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세워 문인 등 예술가와 사회운동가들을 후원해오고 있다. 그는 재단 설립 전에도 한국작가회의나 리영희 재단,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녹색평론’ 등에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내곤 했다. 그가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까닭이다.

1969년 ‘유럽 간첩단’ 휘말려 5년 옥고 ‘동료 사형 집행’ 듣고 만든 노래 등
새달 4일 꽃다지·박치음과 함께 불러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의 시간이길”


지난 7일 서울 교대역 근처 재단 사무실에서 김 이사장을 만났다.

‘김판수 노래전’ 포스터.

그는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72년 여름부터 1년 동안 10곡을 지었다. 9곡은 작사 작곡을 다 했고 ‘서울길’만 친구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였다. “옥에서 김지하 시집 ‘황토’(1970)를 읽는데 서울길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시절 반강제로 고향과 가족을 떠나 서울로 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그들이 고향을 못 잊는 마음을 그린 서정적인 시였죠. 더구나 당시 김 시인이 옥에서 나와 마산의 결핵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터라 마음이 아팠어요.”

“아름다운 세계 그려보던 시절/ 지금은 아득히 멀어져 가고 (중략) 우리들의 평화 찾으려는 싸움/ 승리로 가는 길 헤쳐 나가자.” 그가 이번 공연에서 직접 부르는 서너 곡 중 하나인 ‘삶으로 오라’ 가사이다. 이 곡은 그와 함께 간첩으로 몰린 박노수(1933~1972) 교수가 7·4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28일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담한 심정으로 만든 노래이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 피해자들은 옛 서독 정부의 강한 외교적 압박에 구속자 모두 3년 안에 풀려났지만 이 사건과 혐의 내용이 대동소이한 ‘유럽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은 두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등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대법원은 2015년 재심에서 박노수·김규남 두 사형수와 김 이사장의 무죄를 확정했다.

“대전교도소에서 7·4공동성명 소식을 듣고 당시 서울구치소에 있던 두 분이 사형은 면하겠구나, 안도의 마음이 들었는데 사형 집행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참혹한 심정이었죠. 제가 영국에서 1년 함께 생활한 박 교수는 사상적으로 북을 추종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안온한 환경에서 공부만 한 사람이었죠. 케임브리지대에서 국제법을 가르치던, 국제공법학계의 전도유망한 학자로서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과 그 시절 남북 관계에서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뭔지 알아보려고 했던 분입니다. 굉장히 순진하고 천진난만했어요. 당시 그 분이 쓰고 있던 영문 저술 색인 작업을 도와드린 기억도 있습니다.”

김지하 시 ‘서울길’이 실린 시집 ‘황토’(1970). 김판수 공동이사장은 옥에서 읽은 이 시집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대 영문과 재학 중인 1966년 친구의 외삼촌인 박 교수의 주선과 재정 지원으로 영국(어학 연수)과 덴마크 유학을 떠난 그는 이듬해 박 교수의 권유로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찾았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당시 북한에 대해선 중·고교 다닐 때 받은 반공교육 지식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 북한이 보낸 화보를 보니 우리가 생각한 북한과 너무 달라 충격을 받았죠.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호기심이 생겨 실제 모습을 알아보고 싶었어요. 동베를린 방문으로 제 장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불안도 있었지만 뭐가 옳은지 실제를 알아보고 싶은 지적인 호기심이 더 컸어요.”

3년 전 재단 세워 예술가·활동가 돕고 여러 곳 후원 ‘키다리 아저씨’로 불려
“좋은 영향·도움 주는 게 즐거움이죠”


영국에서 박 교수와 토론하며 한국 현대사에 새롭게 눈을 뜬 것도 영향을 미쳤단다. “해방 이후 한-미 관계에서 보인 한국의 자주적이지 못하고 외세 의존적인 모습을 비롯해 한국의 역사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박 교수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이 되는 점이 많았어요. 그런 이야기들은 대학 시절에는 귀동냥도 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그 때도 북쪽의 개인숭배나 우상화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문학 소년’이었고 유학을 갈 때는 영화 연출의 꿈도 꾼 그이지만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뒤에는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생업 현장을 뛰었단다. “보안법 위반자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회사를 차리고도 외국에 나갈 수 없었죠. 80년대 중반에야 이사관급 고위 공무원인 두 중·고교 동창의 보증을 받아 여권을 발급 받았죠.”

회사를 일구는 데는 옥에서 장기수에게 배운 일본어 실력이 도움이 되었단다. “먹고 살려면 새로운 기술을 알아야겠더군요. 그래서 일본의 도금 잡지에 실린 논문 수백 편을 제가 번역했어요. 그 덕에 도금기술자라는 말도 들었죠. 한동안 회사 매출이 정체되어 있었는데요. 이번에 에이치비엠 도금 약품 기술 승인으로 늘어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노래가 진부하고 유치하다고도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단다. “강제구금 상태에서 만든 제 노래를 보면 억압되어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 어린 독백이 반복됩니다. 어둠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찬란한 빛과 사랑과 자유를 꿈꾸는 독백이죠. 그런데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억압 구조는 기본적으로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경제적 착취나 억울한 옥살이 등 여러 형태의 폭력이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상존합니다. 기득권 세력의 위선이나 이기심도 달라지지 않았고요. 후안무치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면 참담해요. 제 노래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죠.”

그는 내달 공연이 김판수의 과거를 내세우기보단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노동 문제 등은 구조적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살 순 없잖아요. 누군가 개선하려고 노력해야죠. 이 점을 공연에서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 재단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현재 약 100명인 길동무 재단 회원이 늘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사회를 개선하려는 일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재단 운영에 적잖은 사재를 쓰고 있는 그는 최근 김민환, 안삼환, 하명희 작가의 신작 소설을 50권씩 구입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고마워하고 또 격려가 된다면 제 즐거움이고 행복이죠.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도 주고 저도 만족스러워요.” 그는 좋은 노년을 묻는 말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회사 일에 몰두할 때도 나이가 들면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바람을 늘 가졌어요.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잘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후 생활을 위해 저축도 했으니 이제 제 바람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으로 재단을 만들었죠.”

그는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염무웅 교수와 함께 재단 공동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루지 못한 문학의 꿈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그는 염 교수를 통해 많은 문인과 사귀었고 종종 이들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주었다.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공동이사장이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재단 사무실에서 다음달 4일 열리는 공연을 앞두고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길동무 염무웅과의 우정’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제가 간첩단 사건 전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복한 편이었는데요. 그 사건 이후 10년 정도 어려운 삶을 살았어요. 그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잘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염 교수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는 게 올바른 사람이고 훌륭한 삶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 말이 제게는 큰 힘이었어요. 염 교수는 정말 겸손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요. 인간과 인간이 모두 대등하다는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입니다.” 공연 문의 (02)535-3465.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