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민의 와인프릭] 고정관념 완전히 깨려면 몇번이고 계속 이겨야죠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6. 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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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베를린 테이스팅'
칠레 와인의 첫 승리일뿐
칠레의 보물와인 '비네도 채드윅'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 인터뷰

◆ 매경 포커스 ◆

"제 일이 상식이라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이라서요." 지난해 드라마 시청률 순위 5위(16%)를 기록한 '대행사'의 한 장면입니다. 드라마 '대행사'는 지방대 출신 흙수저인 주인공 고아인(이보영)이 극중 업계 1위의 광고대행사(VC기획)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대표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뤘습니다.

이보영 조성하 등 배우들의 열연과 흙수저 성장물이라는 콘셉트로도 인기를 끌었지만, 주요 장면마다 말장난 같으면서도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대사가 적절하게 배치돼 대중에게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팬들은 엔딩크레디트를 백미로 꼽습니다. 주인공은 결국 그토록 바라던 대표 자리에 오르지만, 홀연 퇴사해 작은 독립 대행사를 차립니다. 상식 밖 행보에 동고동락한 직장 동료가 '사람들은 고아인이 대표로 승진하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요?'라며 의아해하고, 주인공이 되레 이렇게 되물으면서 드라마가 끝나죠. "사람들의 생각이라…내 한계를 왜 남들이 결정하지?"

고향과 출신 고교, 대학, 심지어 부모님의 직업을 따지고 그 속에서 사람의 가능성을 가늠해 판단하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 유쾌한 일침을 날리면서 직장인들의 대리만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일 겁니다.

어느 산업에서나 후발주자에게 고정관념과의 싸움은 필연적입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지 못하면 결국 아류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벽이 너무 공고해 수십 번 도전해도 넘기 힘들다는 겁니다. 하지만 뛰어넘기만 한다면, 그 분야의 새 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와인의 역사에서도 수십 년에서 수백 년간 이어진 수많은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신대륙의 와인들은 복합미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해 만족도(가성비)가 좋다' 등이죠.

그런데 이 고정관념에 온몸을 부딪쳐서 저항한 칠레 와인이 있습니다. 비네도스 파밀리아 채드윅(Vinedos Familia Chadwick) 와이너리의 에두아르도 채드윅(Eduardo Chadwick) 회장과 20년 전 그가 기획한 세기의 이벤트, '베를린 테이스팅(Berlin tasting)' 입니다.

채드윅 회장은 지난달 베를린 테이스팅 2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대규모 리마인드 테이스팅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채드윅 회장과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파리의 심판과 베를린 테이스팅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와인 업계에는 '신대륙 와인은 유럽 와인만 못하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했습니다. 그 생각을 첫 번째로 타파한 게 '파리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1976년 와인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벌인, 와인을 보여주지 않고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에서 당시 세계 최고 와인으로 손꼽히던 프랑스 와인들을 신흥 와인 생산국이던 미국 와인들이 꺾은 일입니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파리의 심판에 감명을 받은 채드윅 회장이 2004년 기획한 또 다른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벤트입니다.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 36명의 와인 평론가, 바이어 등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열었는데, 칠레 와인 비네도 채드윅 2000 빈티지가 샤또 마고, 샤또 라피트로칠드, 샤또 페트뤼스 등 프랑스의 유명 와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했습니다.

쉽게 말해 계급장을 떼고 한판 붙었더니, 하극상이 벌어진 셈입니다. 와인 업계에서는 베를린 테이스팅을 파리의 심판과 함께 현대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놀라운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2004년 베를린 리츠칼튼 호텔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 당시 모습. 비네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고정관념과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

베를린 테이스팅을 통해 칠레 와인의 우수성이 입증됐지만, 고정관념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채드윅 회장은 한 번 더 도전하기로 합니다. 1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테이스팅 이벤트를 개최한 겁니다. 나쁜 결과는 좋은 결과를 덮기 쉽습니다. 첫 행사에서 좋은 결과에 도달했더라도 한 번만 삐끗하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막 평가받기 시작한 칠레 와인이 굳이 이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채드윅 회장은 런던, 뉴욕, 도쿄, 홍콩, 서울 등 전 세계 주요 대도시에서 계속 블라인드 테이스팅 행사를 이어갑니다. 서울에서는 2008년과 2013년 두 차례 행사가 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굳이 계속 여러 도시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이어간 것에 대해 그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합니다.

대중이 이미 베를린 테이스팅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으니, 끊임없이 세계를 돌며 증명해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베를린 테이스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채드윅 회장은 "베를린 테이스팅은 변방이었던 칠레 와인을 세계 무대에 등장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와인

사실 채드윅 회장이 자랑하는 칠레의 보물, 비네도 채드윅은 그의 아버지 돈 알폰소 채드윅(Don Alfonso Chadwick)에게 헌정하는 와인입니다.

돈 알폰소 채드윅은 세계 폴로 대회에서 칠레 대표팀을 기네스 기록에 단 1개 모자란 19번 우승시킬 정도로 전설적인 폴로 선수였는데요. 비네도 채드윅은 아버지가 끔찍이 사랑한 개인 폴로 경기장을 갈아엎어서 포도나무를 심고 그 과실로 양조한 와인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가 평생 사랑한 그 땅이어야 했을까요? 바로 현재 칠레 와인의 핵심 산지로 꼽히는 마이포(Maipo)밸리의 푸엔테알토(Puente alto) 지역이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가까운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할 때는 30도 이상 벌어질 정도로 유난히 컸는데요. 큰 일교차는 포도가 산미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성숙돼 농축된 맛을 발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고품질 칠레 와인의 대명사로 꼽히는 알마비바(Almaviva), 돈 멜초(Don Melchor) 등도 이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해 양조하고 있죠.

특히 푸엔테알토는 둥근 자갈이 포함된 충적토입니다. 다양한 크기의 둥근 자갈로 구성된 거친 충적물 위에 점토와 양토가 50~70㎝ 정도 덮인 형태인데요. 수천 년에 걸쳐 토양과 자갈에 축적된 높은 수준의 탄산칼슘이 포도에 신선함과 균형감, 미네랄을 부여하고 복합미를 더해줍니다. 게다가 포도 재배 면적이 불과 축구장 15개 크기인 15헥타르(㏊)에 불과해 한 해에 딱 1만병만 생산합니다. 보르도의 5대 샤또들이 대략 12만~20만병 정도를 생산하는 것에 비하면 한참 적은 양입니다. 정말 희귀하고 귀한 와인인 셈입니다.

아쉽게도 돈 알폰소 채드윅은 포도나무를 심고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드윅 회장은 1999년 이 땅에서 자란 포도로 첫 와인을 만들면서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로 비네도 채드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20년 전 채드윅 회장은 자기가 만든 와인의 품질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 실력만 가지고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의하는 남들의 시선, 고정관념으로부터 싸워왔습니다.

이제는 그 시선이 어느 정도 바뀌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칠레 와인을 마냥 단순한 가성비의 저가 와인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를린 테이스팅을 통해 칠레 와인의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한 지 어느 새 20년, 칠레 와인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채드윅 회장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는 "안목 있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이 성과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구자로서 칠레 와인의 탁월한 품질과 다양성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라는 설명입니다.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칠레 와인의 위치가 그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다시 베를린 테이스팅을 벌인다면 똑같은 결과를 장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당연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한 번 더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몇 번이고 다시 시음회를 열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품질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감을 갖기 위해 스스로 단련했을 수많은 시간이 그려졌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이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좌절하기도 하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과소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비네도 채드윅의 베를린 테이스팅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주어진 세상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력으로 도전한 역사 속에서 다시 일어나 뛸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밌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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