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전쟁 불사' 외치는 정치인에게 권하는 책 [전쟁과 문학]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
전쟁 직접 참가한 경험 녹여내
호평 받고도 판매금지 처분 받아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
해외 여론 압박에 판금 처분 풀려
전쟁 불사하겠단 어리석은 정치인
베트남 작가 바오닌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은 전쟁에 직접 참전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소설이다. 바오닌 소설의 인물들은 베트남 전쟁에 휘말렸던 한국인의 모습과 닮았다. 전쟁의 고통을 외면하고 '전쟁 불사'를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전쟁'이 유일한 경험일 때, 이 진리는 가혹한 운명으로 바뀐다. 베트남 작가 바오닌(본명 호앙 어우 프엉ㆍ1952년~)의 경우가 그러하다. 1952년, 바오닌이 태어날 때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다.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북베트남의 공세가 이어지자 미국은 '도미노 이론(한 국가가 공산화하면 주변의 국가들까지 공산화한다는 냉전시대 미국에서 제기한 이론)'에 입각해 베트남에 개입했고 베트남은 독립한 후 내전에 휘말렸다. 작가가 되기까지 바오닌의 삶은 오직 전쟁으로 점철됐다. 그가 소설에 적은 이 문장은 상상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사람은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거치며 인생은 커다란 고통의 덩어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고통 때문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1969년 17세가 된 '바오닌'은 북베트남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바오닌과 또래 청년들은 3개월간 훈련받고 '호찌민 루트'를 거쳐 남베트남에 침투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소대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불과 몇달이 지나자 바오닌은 고참병이 됐다. 수많은 격전에 휘말렸지만 그는 종전까지 운 좋게 살아남았다.
1975년 4월, 전쟁이 끝났을 때 바오닌이 속한 대대의 생존자는 2명에 불과했다. 바오닌은 종전 후 8개월간 '유해발굴단'에 참가해 정글에 흩어진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미국에 맞서 승리했다는 기쁨에 베트남 전역이 들썩거렸지만, 종전 이후 전역병들의 삶은 비참했다.
전쟁으로 국토는 심각하게 훼손됐고, '해방전사'에서 '잉여인력'으로 전락한 전역병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전역병들과 식량 밀수로 생계를 이어가던 바오닌은 뒤늦게 문학 학교에 입학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 학교에서는 사회주의의 낙관적인 전망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글쓰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바오닌은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1991년, 바오닌은 자신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17세 청년 '끼엔'과 그의 연인 '프엉'의 사랑이 전쟁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바오닌은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소설 속에 그려진 북베트남의 어린 병사들은 정부가 선전하는 '위대한 사회주의 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겁에 질려 탈영하는 자도 있었고, 어떤 병사들은 공포를 이기려고 도박과 마약에 빠졌다.
바오닌의 첫 소설 「전쟁의 슬픔」은 출간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베트남 작가협회는 이 소설에 '최고 작품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은 이 소설의 제목을 '사랑의 숙명'으로 변경한 다음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미국에 맞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조국해방전쟁'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였다.
베트남에서 금지된 이 소설은 해외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16개 언어로 번역됐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바오닌과 더불어 베트남은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1995년 영국에서 인디펜던스 번역 문학상을 받았다. 1997년 덴마크에서도 외국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바오닌은 베트남을 상징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결국 베트남 정부는 해외 언론의 압박에 못 이겨 소설의 판금 조치를 풀었고, 원래 제목인 '전쟁의 슬픔'으로 다시 출간됐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서는 고엽제 후유증 문제와 베트남전 국군포로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1999년에 국내에 번역된 바오닌의 소설은 베트남 문학과 역사를 향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다음해 한국 작가회의와 베트남 작가회의가 결연을 맺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한국의 3번째 교역국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서로 총을 겨눴던 과거가 무색할 정도다.
하지만 두 나라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물적 교류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이해가 병행해야 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적 기억과 상처는 매우 닮았다. 두 나라는 오랜 기간 외침에 시달렸고,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었다.
바오닌의 소설은 안정효의 「하얀전쟁」,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배평모의 「지워진 벽화」 등 베트남전쟁을 다룬 한국 소설들과 겹친다.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끼엔'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바오닌은 여전히 초라한 집에 머물면서 정글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애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라도 단 하루만 전쟁을 겪는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는 지금도 전장에서 죽은 이들의 환영을 본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 '끼엔'의 입을 빌려 전쟁이 남긴 교훈을 적는다.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우리 모두의 공동 운명인 것이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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