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낙성이다, 감옥에서 나왔다” 스스로 신분 공개한 탈주범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사실상의 자수 안 했다면 최장기 탈주범 신창원의 기록 깼을 수도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는 '경북북부교도소'가 위치해 있다. 원래 '청송교도소'로 불렸지만 청송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2005년 8월 사회보호법이 폐지되기 전에는 청송보호감호소였다. 징역형을 마쳤지만 재범 우려가 있는 상습범이나 흉악범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재수용되는 곳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거나 '가혹한 이중처벌'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치질 수술 위해 병원에 입원하자 탈주 감행
2004년 1월 청송보호감호소에 이낙성(40)이 들어왔다. 1964년 경북 경주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처럼 살았다. 두 명의 형이 있었지만 어릴 때 헤어져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다.
이씨는 22세 때인 1986년 인천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다 배달 간 집에서 녹음기를 훔친 것을 시작으로 범죄 인생을 살았다. 2년 후인 1988년에는 강도상해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한다. 2001년에 출소했지만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씨는 서울 도봉구 수유동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혀 징역 3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을 마친 후에는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감호소 내에서 그는 말이 없고 조용했다. 재소자들과 부딪치거나 갈등 없이 평범하게 지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동을 거르지 않았고,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할 만큼 체력이 좋았다.
감호소에 들어온 지 1년3개월째인 2005년 4월6일 이씨는 치질 수술을 받기 위해 경북 안동의 한 병원에 입원한다. 교도관 3명이 동행하며 이씨를 감시했다. 다음 날 새벽 1시쯤 교도관 한 명이 근무지를 이탈해 집에 가고, 나머지 두 명은 점퍼를 벗어놓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감시가 소홀해지자 이낙성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탈주를 감행한다. 교도관의 점퍼를 훔쳐 환자복 위에 입고,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의 전화를 빌려 교도소 동기 엄아무개씨(38)에게 전화를 걸어 탈주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새벽 4시쯤 서울 잠실 롯데월드 앞에 도착했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엄씨를 만났다. 그는 택시비 20만원을 대신 내주고 자신의 승합차에 이씨를 태운 후 옷을 갈아입게 하고 도피자금을 줬다. 이씨는 사당역 인근에서 내린 후 자취를 감춘다.
청송보호감호소 측은 한참 후인 당일 오전에야 경찰에 이낙성의 탈주를 신고했다. 안동경찰서 수사반이 곧장 추적에 나섰으나 이미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경찰은 포상금 1000만원을 내걸고 전국 숙박업소와 버스터미널, 기차역 등을 중심으로 수배전단을 뿌렸다. 이씨가 고통이 심한 치질 4기란 점을 중시해 전국의 항문 전문병원과 약국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수배관서인 안동경찰서뿐만 아니라 연고가 있는 지역의 경찰서에 모두 30개 팀 166명 규모의 검거 전담반을 꾸리는 등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나섰으나 이낙성의 행적을 찾는 데 실패한다. 초기에는 시민 제보가 쇄도하는 등 검거는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탈주 이틀째인 4월9일에는 이낙성이 강화도에서 교도소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이에 따라 경찰은 1000명이 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해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검문검색을 강화하면서 이씨가 숨어들었을 만한 숙박업소와 야산, 사찰 등을 집중 순찰했다. 경찰은 이씨가 강화도에 잠입했을 것으로 확신했지만 이 신고 자체가 허위로 드러났다. 이씨의 교도소 동기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교도관들을 골탕 먹이려고 꾸며냈던 것이다. 이후에도 제보가 쏟아졌지만 대부분 오인 신고로 판명 나며 이씨의 행적은 오리무중 상태가 된다. 심지어 해외 밀항설까지 나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검문 한 번 받지 않고 생활
이낙성의 도주 수법은 경찰의 허를 찔렀다. 그는 사람들 속에 스며드는 것을 선택한다. 사당역 인근에서 내린 후 택시를 타고 남대문 인력시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소개받아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의 한 중국음식점에 취업했다. 여기서 석 달 정도 설거지를 하며 월급으로 120만원을 받았다.
서울 마포의 중국음식점에서도 두 달 정도 같은 일을 했다. 이후에도 인력시장을 통해 서울 강남, 경기도 부천 등지의 중국음식점을 떠돌며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면을 뽑는 일을 거들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잠자리는 식당에 딸린 방에서 해결하거나 여관, 공원을 전전하기도 했다. 하루 일하고 하루 돈을 받는 일당식으로 일해 인적 사항이나 본명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서류를 작성하지 않아도 돼 의심을 받지 않고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낙성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 곳에서 석 달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월급을 받으면 한동안 일을 하지 않고 술로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돈이 떨어지면 인력소개소를 통해 식당 일자리를 얻었다. 쫓기는 듯한 불안심리와 폭음으로 살이 빠지면서 얼굴도 검게 변해 갔다. 수배 전단과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씨는 도주 중 경찰의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이씨가 한 달간 일한 서대문구 대현동의 한 중국음식점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차량으로 10분 거리, 서울 서부보호관찰소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탈주범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씨는 자신이 일한 식당의 주인이나 종업원들과는 별로 대화가 없었다. 자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고 말썽 없이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도 이낙성을 의심하거나 그가 도망자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해를 넘겨서까지 붙잡히지 않았다.
2006년 10월30일 이낙성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한 중국음식점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0시30분까지 일하고 일당 9만원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구 신촌의 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혼자 소주 6병을 마셨다. 술에 취한 이씨는 택시를 타고 숙소가 있는 성수동으로 가서 여관 계단을 올라가다 2층에서 굴러 위쪽 앞니 두 개가 부러지고 아랫입술도 심하게 찢어졌다. 10월31일 아침에 눈을 뜨니 성수동의 길가였다.
술이 깰수록 상처는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 통증을 참다못해 근처에 있는 영동병원을 찾았다. 원무과 직원에게 처음에는 무협지 소설 속 주인공인 '정종철'이라는 이름을 댔다가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자 "내가 이낙성이다. 감옥에서 나왔다. 이낙성이라면 경찰이 올 거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병원 측은 이씨의 턱에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여 응급치료를 해줬다. 이씨가 병원을 나가자 원무과 직원은 인근 지구대에 "탈주범 이낙성이 병원에 왔다가 나갔다"고 신고했다. 병원 문을 나선 이씨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10여 분 정도 천천히 걸었다. 이 모습을 길거리 구두 수선공이 보고 병원 안팎을 수색하던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병원에서 80m 지점에서 이씨를 발견하고 그의 팔짱을 끼며 "이낙성씨"라고 불렀고, 이씨는 "예"라고 대답했다.
이씨는 저항 없이 순순히 수갑을 찼다. 경찰은 지문 대조를 통해 이씨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로써 약 1년7개월에 걸친 도망자 생활도 끝이 났다. 검거 당시 이씨는 살이 많이 빠지고 머리가 다소 긴 상태였으며 검은색 바지에 줄무늬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소지품은 6만6000원이 전부였다.
그는 경찰에서 병원에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에 대해 "오랜 탈주생활에 지치고 힘들어서 자수할 생각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도주한 것을 후회한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낙성 검거는 경찰이 추적해 잡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시민들이 신고하면서 가능했다.
탈주 4개월 후 보호감호제 폐지
이낙성은 도주 혐의에 탈주 당시 교도관의 지갑과 휴대전화가 들어있던 점퍼를 훔쳐 절도 혐의가 추가됐다. 대구지법 의성지원은 이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여기에 남은 보호감호 5년9개월을 포함해 7년3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씨가 탈주한 지 4개월 후 보호감호제가 폐지돼 대다수 재소자는 감호소에서 출소했다. 폐지 이전에 보호감호를 선고받은 재소자는 그 기간을 계속 복역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선처를 받은 것이다. 이씨도 탈주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넉 달을 참지 못해 또다시 장기간 수감생활을 하는 신세가 됐다.
이씨의 탈출을 도왔던 교도소 동기 엄씨는 구속돼 처벌받았고, 직위해제됐던 청송보호감호소 보안과장은 이후 보직을 받고 다른 교도소로 옮겼다. 이낙성 호송을 맡았던 교도관 3명은 해임됐다가 소청심사를 거쳐 정직 3개월로 감경 조치됐다. 이로써 이 사건과 관련한 모든 법적 처리가 마무리됐다. 이낙성은 현재 만기를 채우고 풀려나 다시 사회에 나왔다.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낸 그가 현재 어떻게 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창원과 이낙성의 완전히 다른 도주 수법
이낙성은 희대의 탈옥수인 신창원(2년6개월)에 이어 두 번째 장기 탈주 기록을 세웠다. 신창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절도 행각을 통해 도피자금을 마련했다. 또 다방 등 유흥업소 여성들과 동거하며 숨어 지내다가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반면 이낙성은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일을 하면서 도피자금을 벌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꼭꼭 숨어 지낼 것이라는 도망자의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다. 추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말썽을 피우지 않는 등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 아무도 그가 탈주범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2~3개월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한동안 번 돈으로 술을 마시며 지냈다. 숙소는 식당에 딸린 방이나 서울 한복판인 신촌과 시청 주변의 여관을 이용했다. 일각에서는 이씨가 다쳐 병원에 가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신창원의 탈주 기록을 뛰어넘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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