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돼지 먹일 사료도 없다"... 북한군 내부 문건에 담긴 굶주림 실태[문지방]

김형준 2024. 6. 1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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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인근 중대 '지침 문건' 보니
군사분계선 지뢰밭서 고라니 사냥
폭력·일탈에 멍든 軍실태 고스란히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2019년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모습. 사진 속 북한 군인들이 돼지로 보이는 가축을 임진강변에서 몰고 있다. 연합뉴스
“흰쌀과 잡곡 비율을 바로 하여 한 알의 식량도 허실 없이 할 것.”

박정희 정부 시절 ‘혼·분식 장려운동’이 떠오르는 이 구호는 올해 초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일선 부대의 ‘내부 지침’입니다. 쌀 수급이 어려워 국가적으로 혼식(쌀 이외 여러 잡곡을 섞어 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 섭취를 장려(혹은 강요)했던 남한의 1960~70년대 방침이 북한에서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가 대북 채널을 통해 입수한 4페이지 분량(A4용지 기준)의 '월간 사업계획서' 문건에 드러난 북한군 실태는 최근까지 '오물 풍선' 수천 개를 날리며 우리를 자극한 북한 지도부의 패기 있는 모습과는 놀라울 정도로 딴판이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에 신음하는 압록강 인근 부대 병사들의 실태는 물론 가혹행위와 일탈도 한데 녹아있습니다. 각종 문제에 대한 대책은커녕 책임 회피에 급급한 간부들의 치졸한 행태도 드러납니다.


“지뢰밭 GP 인근 전력질주…알고 보니 고라니 사냥”

육군 5사단 GOP 장병들이 철책을 따라 경계작전을 수행하는 모습. 육군 제공

문건을 보면 중국 접경지 부대에선 ‘탈북 단속’이 최대 과제로 꼽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대 구간에 지뢰 매설을 다시 하라’거나, 탈북 인원을 단속할 군견 부대 내 견사 우리를 다시 지으라는 지침 등 반(反)인권적 탈북 억제책도 눈에 띕니다.

그런데 내용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탈북 단속이란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병사들에 대한 인권 실태부터 상당히 열악해 보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단연 식량 부족과 질병 문제. 정치지도원 ○○○에게는 “중대 내 환자, 발병자, 동상자, 허약자들이 없도록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지침을, 또 다른 간부에겐 “중대 안 모든 군인들의 식량과 소금 문제, 허약자들에 대한 대책 문제를 완결하라”거나 “중대식량 허실문제, 부족문제, 대책문제를 구체적으로 매일 보고하라”는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염소 마리 수가 줄어드는 데 대한 보충 사업과 ‘돼지 기르기’ 비법 전수, 사료 부족문제 대책을 보고할 것”이라는 지침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을 곡물 문제뿐 아니라, 식량으로 삼을 돼지 키울 사료까지 부족해지는 등 가축 관리조차 어려운 실태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군부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염소 개체 수 관리 △돼지 육성 노하우 전수 △사료 부족 문제 해결책을 병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매뉴얼이나 방법은 제시하지 않으니 과업을 완수해야 할 병사들이 얼마나 난감해할지 짐작됩니다.

실제 군사분계선(MDL) 인근을 지키는 우리 최전방 부대에서도 식량 부족 정황이 목격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지난달 국방부 기자단이 찾은 경기 연천군 육군 제5보병사단 관계자는 “얼마 전 북한군의 ‘고라니 사냥’이 목격됐다”고 했습니다. 북한군들이 감시초소(GP) 인근에서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모습이 포착돼 긴박한 상황으로 보고 동태를 살폈더니, 북한군들이 고라니 한 마리를 잡아 돌아갔다는 겁니다. 먹고살기 위해 ‘지뢰밭’ 인근에서 목숨을 건 전력질주로 고라니를 잡아야 하는 북한군의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푸틴 만나는 김정은, 식량과 일자리 문제 당부할 듯

농사를 짓고 있는 북한 주민들. 평양=노동신문 뉴스1

올해 북한이 큰돈과 공을 들여 선보인 ‘파이팅 넘치는’ 군사적 행보와 비교했을 때 식량난에 직면한 병사들의 박탈감은 더 커졌을 법합니다. 정찰위성 발사 실험과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 발사 실험에 쓴 돈만 해도 가늠이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말엔 개량된 성능의 초대형방사포를 한 번에 무려 18발을 쏘며 무력 도발을 이어갔습니다. “초대형방사포 한 발에 20억 원 이상”이라는 우리 군 관계자 설명대로라면 하루에만 400억 원 가까운 비용을 쓴 셈이죠. 오물을 모으고, 주워 담고, 풍선에 타이머까지 장착해 날린 수천 개의 오물 풍선에 들인 공도 상당합니다.

북한 내부의 식량부족이 심각하다는 지적은 늘상 제기돼 왔지만, 군부대의 식량부족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 의견입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15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북한은 3단계에 걸쳐 식량난에 대비한다”며 “비축미를 풀고, 그것이 부족하면 군량미를 풀어 일반 주민들에게 준다. 그런데 군량미까지 부족하면 중국과 러시아 등에 손을 벌린다”고 합니다.

최근 북한군의 식량 사정에 비춰봤을 때, 임박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강화할 군사협력 의제에 식량 원조 문제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은 “군부대 인근의 가축은 남아나질 않는다고 보면 된다”고 단언했습니다. 그 배경으로 “부대에 식량 공급이 안 돼 대부분 자력갱생하니, 인근 마을 가축까지 빼앗거나 훔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이미 북한군 내에서 ‘군기’의 의미가 크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구타 일삼는 간부, 군기 빠진 병사들

10일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 북한군 초소가 자리하고 있다. 뉴스1

문건과 북한 전문가들 발언을 종합하면, 북한군 기강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듯합니다.“소대 군인에 대한 구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탄약 오발사고 올바로 분석하고 대책 할 것”이라는 지침, 여기에 “밀수 밀매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요구 수준을 높일 것”이라는 내용까지. 가혹행위를 일삼는 간부나 군기 빠진 병사까지 윗물 아랫물 가릴 것 없이 부패한 상태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간 드러나지 않던 ‘병영문화 개선’ 노력이 문건에서 발견된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분대장의 치명적 결함인 구타 문제를 고쳐주고 비판해 어린 전사들 가슴속에 멍이 들지 않도록 하고, 심하면 ‘철직(직책이나 직위에서 물러남)’ 문제까지 제기할 것”이라며 특정 간부에 대한 엄중한 대응까지도 예고한 겁니다. 이는 군대 내에서도 꾹 눌러 참던 병사들의 불만과 동요가 일고, 간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식한 게 아니냐는 추론 또한 가능한 대목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처럼 오합지졸에 사기가 추락한 병사들을 어떻게 운용할까요. 전문가들은 ‘군인의 노동자화(化)’가 가속화될 가능성을 높게 봤습니다. 안 이사장은 ”김 위원장이 향후 핵 전력을 전진배치하면서 군인들을 도로, 항만, 건설, 철도 공사 등 각종 토목사업에 동원하거나 러시아에 노동자로 파견해 외화벌이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러시아 소식통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북 때 김 위원장이 12만 명의 근로자를 받아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며 “이런 계획이 실현될 경우 대부분 군인을 노동자로 파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습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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