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에코 레더'는 정말 친환경적일까
이름만 바꿔 판매하는 '그린워싱' 만연
자연 유래 소재 가죽 기술개발도 활발
[생활의 발견]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을 다룹니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그 뒷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생활의 발견]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들은 어느새 인싸가 돼 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패션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한번쯤 '비건 레더(vegan leather)'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최근 수년 사이 가죽 제품에 아주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데요. 주요 포털 사이트, 패션 플랫폼 등에서 비건 레더를 검색하면 수많은 상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에코 레더(eco leather)'라는 단어도 비건 레더와 혼용됩니다.
'비건(vegan)'은 고기, 달걀, 우유 등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먹는 것뿐만 아니라 동물을 착취해 만든 물건의 소비를 지양하는 '비거니즘(veganism)'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다른 동물성 제품의 사용을 피하는 관행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죠. 따라서 비건 레더는 동물 피혁이 아닌 다른 소재로 만든 가죽을 의미합니다.
채식주의를 선택한 사람들이 보통 동물권 외에도 환경 오염에도 관심이 높다보니, 비거니즘은 종종 환경주의와도 연결됩니다. 비건이 곧 친환경이라는 인식에 '비건 레더'를 '에코 레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비건 레더가 동물 가죽보다 친환경적일까요?
'레자'의 재발견
앞서 설명했듯 비건 레더는 동물성이 아닌 다른 소재로 가죽의 느낌을 살린 일종의 '인조 가죽' 혹은 '대체 가죽'을 말합니다. 비건이라는 단어 때문에 '자연 유래' 소재만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이죠.
시장에 가장 먼저 등장했고 현재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건 레더는 '플라스틱 가죽'입니다. 플라스틱 가죽은 우리가 예전부터 '인조 가죽' 혹은 '레자'라고 불러온 바로 그 합성피혁입니다. 패션업계에서는 '페이크 레더(fake leather)', '포 레더(faux leather)' 등 다양한 용어도 사용됩니다. 이 인조 가죽은 폴리우레탄(PU),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에스테르 등 플라스틱 합성섬유로 만들어집니다. 최근 유행하는 비건 레더 혹은 에코 레더들은 대부분 여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종류의 비건 레더는 그다지 친환경적이지 않습니다.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비건 레더가 맞긴 하지만 주요 소재인 플라스틱이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의 양도 많고, 나중에 재활용하기 힘든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많은 패션업체들은 '인조 가죽', '레자' 같은 말을 대신해 비건 레더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소비자들이 '인조', '가짜' 같은 단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젊은 Z세대를 중심으로 가치 소비가 확산하자, 이들을 타깃으로 한 친환경 마케팅 수단의 하나로 비건 레더가 적극적으로 활용됩니다. 일종의 '그린워싱'인 셈입니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해외에서도 '비건 레더'라는 단어의 의미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의견들이 나오죠. 그래도 이 종류의 비건 레더 생산 단계에서 동물을 착취한 것은 아니므로 소비자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하면 됩니다.
국내에서는 비건 레더 표기와 관련해 법제화 된 규정이 별도로 있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그린워싱'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관한 심사지침을 개정하기도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제재가 이뤄진 건 아닙니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의류 레이블, 온라인 쇼핑몰의 제품 상세정보 등을 통해 어떤 소재로 만들어진 비건 가죽인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 '비건' 소재 등장
물론 패션·섬유업계도 조금씩 진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각광 받고 있는 새로운 비건 레더로는 식물성 소재와 PU를 합성한 타입 그리고 플라스틱 프리가 있습니다.
식물성 소재와 PU를 섞은 가죽은 최근 새로운 '친환경 가죽'으로 급부상하는 인조 가죽입니다. 직물에 식물성 물질을 바르고 그 위를 PU로 코팅해 내구성을 높인 타입입니다. 여전히 일부는 플라스틱 합성섬유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 비중을 줄여 환경에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합니다. 때로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소재를 활용하기도 하죠.
플라스틱 프리는 아예 플라스틱 합성섬유 소재를 쓰지 않은 인조 가죽을 말하는데요. 새우 껍질과 버섯 폐기물에서 나오는 생체 고분자를 활용하거나, 코르크나 천연 고무나무 등도 사용한다고 하네요.
우리 정부도 이 같은 흐름에 발을 맞추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바이오매스 기반 비건 레더 기술 개발 사업에 2028년 총 486억원의 R&D 투자를 집행하기로 했죠. 충청남도 부여시, 부산광역시 등에서 버섯을 활용한 비건 레더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국내 패션기업들도 친환경 가죽 제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앞서가는 기업 중 하나는 코오롱인더스트리FnC(코오롱FnC)인데요. 코오롱FnC의 코오롱스포츠는 기능성 아웃도어 스니커즈 브랜드 '무브'를 통해 지난해 '무브 어스(MOVE EARTH)'라는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무브 어스는 외관의 90% 이상에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상품군입니다. 첫 제품은 주스 등 가공식품을 만들고 난 후 버려지는 사과를 가공해 만든 비건 가죽 '애플 스킨'을 적용했고요. 올 봄·여름 시즌에는 제주 지역에서 농업 부산물로 버려지는 선인장 잎을 가죽의 형태로 개발한 소재를 적용한 제품도 내놨습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해부터 해외의 친환경 패션 브랜드 '판가이아(PANGAIA)'를 국내에 선보이고 있습니다. 판가이아는 환경 보호를 사명으로 해 동물성 소재 및 석유 기반 합성 소재를 대체할 수 있는 천연 소재 개발에 주력하는 브랜드입니다.
최근에는 가죽 외에도 여러 친환경 소재를 앞세운 컬렉션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LF의 헤지스는 환경을 존중하는 농업법으로 재배한 섬유를 사용한 여름 린넨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많은 고객들이 친환경 제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올 봄·여름 린넨 시리즈 매출은 전년 대비 약 40% 늘었다고 하네요. 이외에도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컬렉션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현재 패션·섬유업계가 내놓는 제품들이 완전히 '친환경'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직 환경을 위해 나아갈 길이 한참 남아있죠. 그럼에도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 조금씩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어가는 것 역시 하나의 '친환경'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혜인 (hij@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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