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관두면 더 잘 키울 수 있을까”…엄마의 죄책감, 아이를 더 힘들게 만들수도 [워킹맘의 생존육아]

이새봄 기자(lee.saebom@mk.co.kr) 2024. 6. 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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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픽사베이]
“옆에서 보니, 내가 아기 엄마만큼 아기를 잘 봐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칭찬인가 우려인가. 분명 칭찬을 했을 텐데 나에게는 우려로 들린다. 육아휴직 막바지, 복직이 코앞인 엄마는 아이를 맡기기로 결정한 시터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지금까지 다른 아이들을 여럿 봤고 내 아이들을 키운 노하우도 있어서 솔직히 이제 막 아기들 키우는 엄마들보다는 아이들 잘 돌볼 자신이 항상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내가 엄마보다 더 아이들에게 잘 해줄 자신이 없어서 고민이 되네요.”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는 부끄럽지만 돌아보면 나는 누가 봐도 꽤나 헌신적인 엄마였다. 물론 당시 육아휴직 중이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일하는 엄마라 온전히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1년밖에 없다는 생각이 나 자신을 더 헌신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휴직 기간만큼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나의 헌신은 때로는 예상을 넘어서는 수준이기도 했는데, 맛집 다니기가 취미일 정도로 먹는 것에 관심이 많지만 육아 중에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못한다는 표현보다는 안 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수면욕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 몸이 축났다.

복직을 앞두고 아이들을 돌봐줄 시터를 구할 때는 여기에 불안감까지 더해졌다. 엄마 대신 엄마처럼 해 줄 사람을 찾는 게 애초에 무리수인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줘야 한다는 압박이 다가왔다. 하지만 어떤 시터가 엄마처럼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게다가 갓 돌이 지난 아이와 만 세살짜리로 터울 적고 너무도 어린 두 아이를 도맡아서 돌봐줄 시터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물론 두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이 세배, 네배로 늘었지만 아이들이 조금 더 큰 지금 그 시절로는 나조차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것이 사실이다. 공급은 적고 수요가 넘쳐나는 시장, 다른 대안이 많은 시터분들에게 우리 가정은 후순위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시터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시터에게 맡기고 집에서 나와야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더 줄어드는 것 같아 그 시간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며칠 후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벌써부터 이런 연습을 시켜야 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이 회의감과 걱정은 몸이 아니라 마음까지 망가트렸다. 어느 날부터인지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자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서 심박수를 측정해보니 평균 수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하고 다시 측정해도 마찬가지였다. 갑상선과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불안감으로 인한 증세일 수 있다는 게 의사의 판단이었다. 최근 진행한 건강검진에서 모두 정상 수치가 나왔기 때문에 불안장애로 인한 증상으로 결론 내려졌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지고 몸의 긴장이 지속되면서 몸의 긴장을 조절하는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불필요하게 긴장되고 초초하면서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상황조차도 불안해 하는 일이 잦아졌다. 단순히 근육 이완 운동이나 심호흡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의사의 조언에 결국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그제야 내 감정이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구나, 이건 정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버리면 오히려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좋지 않은 상태가 그대로 전이 될 수밖에 없다.

‘미니멀 육아의 행복’이라는 책의 저자가 본인의 육아휴직 기간을 떠올리며 책에서 언급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육아휴직 기간 내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차라리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하는 편이 훨씬 덜 피곤했을 거라고 말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돌봄을 거의 받지 못했고, 그것에 따른 보상심리로 과잉보호 행동을 한 것 같다고 토로한다. 놀아주시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신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식에게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도리어 ‘과하게’ 육아에 열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 과거에 대해 부모님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결국 자신은 별 탈 없이 컸고, 일곱 아이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부모님이 자신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저자와는 반대의 이유로 아이를 과잉보호했던 것 같다.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엄마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덕분에 어린 시절 엄마와 떨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지금 내 아이들에게 나는 내 엄마처럼 항상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게 늘 미안하고 마음이 쓰였다. 너무 어릴 때 엄마와 헤어진 경험이 아이들 정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 미안함과 두려움이 너무 커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온몸을 갈아 헌신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갖는 죄책감은 그야말로 부작용만 유발하는 ‘감정 쓰레기’일 뿐이다. 쓰레기는 안고 가는 게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 맞벌이 부부 밑에서 자란 수많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 않은가. ‘일하는 엄마’라는 현실을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쪽은 아이들이다.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까지 ‘엄마가 회사를 다녔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하는 일은 없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오롯이 아이에게 몰입해서 보낸다면 말이다.

몇년 전 별세한 심리학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전 세계 수많은 맞벌이 부모들의 죄책감과 부담감을 덜어준 ‘양육가설’이라는 이론을 1995년 내놨다. 과거에는 근무 등을 이유로 자녀를 어린 나이에 어린이집에 맡기느라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지 못하게 됐을 때 부모가 주로 양육한 아이들에 비해 문제아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게 학계에서도 ‘정설’로 알려졌다. 하지만 해리스는 명쾌하게도 자식이 잘못되는 것은 부모 탓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아이들을 원하는 대로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며 “아이들을 완벽한 존재로 기르는 것도, 아이를 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양육은 아이의 인성과 사회화에 극히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며 결정적인 환경은 집 바깥의 또래그룹이라는 게 그의 연구 결과다.

아이를 항상 곁에 두지 못한 엄마의 마음은 마냥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필요한 건 불안감이 아니라 안정감일 것이다. 집착이 아닌 사랑일 터다. 아기가 파김치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보다는 행복한 엄마의 미소를 원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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