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없는 그곳의 적막함 [1인칭 책읽기: 시인수첩 휴간에 부쳐]

이민우 기자 2024. 6. 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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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문예지 「시인수첩」 휴간
그 어떤 파동도 없는 휴간
독자 유입 없다면 변화도 없어
문예지가 발간을 멈춰도 그 어떤 파동도 일지 않는다.[사진=펙셀]

문예지 '시인수첩'이 올해 발간되지 않았다. 2011년도 여름에 첫호가 나왔으니 13년간 나오던 문예지가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문예지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수년을 운영한 문예지가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논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시인수첩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번역 출간한 것으로 잘 알려진 문학수첩에서 만들었다. 당시에는 장르문학에서 벌어들인 돈을 문단문학에 투자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시인수첩의 결의는 제법 숭고했다. 문학수첩의 대표였던 김종철 시인이 광고나 외부기관의 도움 없이 운영하겠다는 목적으로 사재 20억원을 출자해 만들었다.

당시 시인수첩은 탄생과 함께 문학계의 오랜 문제였던 작가 원고료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경렬 서울대 교수,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 허혜정 한국사이버대 교수가 편집위원을 맡았고 김병호 협성대 교수까지 함께했으니 원대한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2021년 문예지 시인수첩은 출판사 ㈜여우난골에 양도됐고 운영을 이어갔다.

사실 문예지가 독자를 잃었다는 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2019년 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문예지 독자 249명 중 93.0%에 해당하는 231명이 문예 창작자였다. 일반 독자는 7% 남짓일 정도로 문예지를 소비하는 사람은 결국 문예지를 만드는 사람이었던 거다.

문예지들의 공적 역할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문예지는 자생력을 잃어 갔다. 그러다 문예지의 입지를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0년 문예지 '시인동네'에서 발생한 성추문이다. 발행인이 문예지를 폐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문예지의 운명이 발행인의 자본력이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누군가의 소유물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문예지가 사라져도 아무런 파장이 없는 건 작금의 문예지 위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2024년 '소리도 없이' 사라진 문예지는 시인수첩만이 아니다. 1972년에 시작해 600호 넘게 명맥을 이어오던 월간잡지 '문학사상'은 5월호가 나오지 않았다. 1980년에 시작했던 '실천문학' 역시 147호, 이를테면 2023년 봄·여름호를 끝으로 새 문예지를 발간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들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문예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무런 파동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예지 생태계 다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조용한 이유는 사실 그곳에 아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절대적이고 훌륭한 작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백마 탄 왕자' 같은 허구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자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좋으니 독자의 수를 늘려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골든타임일지 모른다. 텅 비어버린 공간의 침묵은 생태계의 공허를 의미한다. 이 거대한 고요는 문학계 내 순혈주의, 엘리트주의, 문학권력을 넘어 생태계가 말라 죽는 것을 암시한다. 당장 고개를 돌려 다른 생태계를 바라보면 북적이고 시끄럽고 뜨겁다. 하지만 최근 문예지에 실리는 글들은 독자와는 상관 없이 움직이는데다 최선을 다해 '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스파크도, 논란도, 소음도 없이.

우리는 공허를 채워야 한다. 논란이 일고, 시끄럽고, 부딪히는 스파크가 필요하다. 독자와 함께 할 거대한 소음이 필요하다. 그 소음은 독자일 것이고 또 문학이 될 것이다. 지금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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