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 탐험한 중세 유럽과 현대 서울의 인물산수

심정택 칼럼니스트 2024. 6. 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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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22년 한국 생활의 아비투스를 캔버스에 적고 벽에 남기다

(시사저널=심정택 칼럼니스트)

브루노(Bruno) 작가는 선과 선을 연결하는 오토매틱 법을 구사한다. 캔버스든 벽화 작업이든 동일하다. 시작법(詩作法)의 무의식적인 자동기술법과 유사하다. 기본 구도를 잡은 후 하나의 형태(모양) 또는 캐릭터에서 시작해 새로운 캐릭터와 형태를 계속 이어가며 그린다. 브루노 작가의 작품은 직관에 기댄 의식의 흐름으로 내면의 상상과 외부(대상)를 접목해 수많은 도시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브루노는 형상들을 단순화해 화면 속에 마치 물이 흐르듯 조형적이면서 율동감 있게 배치한다. 화폭 안의 대상 상호 간에는 리듬이 작용한다. 두 대상(신체) 사이, 신체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평면에 고착된 듯한 형태는 반복되며 모든 도상(圖像)은 각양각색이다.

작품에서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의 화풍을 연상할 수 있으나 디테일과 밀도, 스토리 창출 면에서 브루노가 월등히 그를 앞선다. 캔버스 작업은 빼곡하게 형태를 채우며 세밀한 선을 표현하기 위해 펜을, 채색은 수채화에 가까운 맑은 색을 내는 마커용 잉크를 사용한다.

ⓒ시사저널 박정훈

인종·거주지·언어의 경계를 넘다

그의 작품은 동화, 오래전에 본 영화, 보자르 재학 중 연극동아리 배우로 직접 무대에서 경험한 장면, 프랑스 고전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17세기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 희곡의 주인공인 의사, 과학자 등은 대부분 복잡하고 다층적인 내면의 소유자들이다. 16세기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팡타그뤼엘의 아버지인 위대한 가르강튀아의 소름끼치는 이야기》(1534)는 가르가멜의 출산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브루노 작품에서 보여지는 도상들의 형태적 이미지는 각종 텍스트에서 보여지는 해학 또는 '그로테스크', 기타 무엇으로든 해석이 가능하다.

브루노는 읽고, 듣고, 낭독해 체득한 연상 이미지들을 그림으로 구현하면서 은연중 20년 이상 살아온 한국에서의 삶을 드러낸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가 규정한 개인의 성향과 인지 틀, 감수성인 자기만의 '아비투스(Habitus)'가 작동하지 않겠는가. "(브루노 작품 속) 주인공은 'Lutin(악동의 뜻을 가진 프랑스어)'으로 숲속에 사는 이, 요정 같은 의미다. 미야자키 히야오 작품 느낌도 가져왔다."

브루노에게 중요한 장르인 드로잉 퍼포먼스는 연극 공연처럼 가면을 쓰며 연주자와 협업하기도 한다. "영화는 촬영이 끝나도 편집으로 수정할 수 있으나 연극은 편집이 없다. 퍼포먼스는 연극과 그림이 어울리는 과정이다."

브루노는 프랑스 남부 칸과 니스 사이의 해변 도시 앙티브(Antibes) 출신이다. 비즈니스 스쿨을 다닌 후 에콜 데 보자르 드 마르세유 입학을 위해 포트폴리오에 그림뿐 아니라 시 작업도 포함시켰다. 보자르의 전공은 커뮤니케이션(영화, 사진 등), 디자인, 미술(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로 구분된다.

브루노 작가가 22년 전 한국으로 이주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보자르에서 만난 같은 반 한국 여성과 결혼했고,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브루노는 5년 과정의 보자르 수료 후 암스테르담에서 대학원 과정의 드아틀리에(de ateliers)를 다녔다. 6년여 동안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 컴퓨터 일을 하며 영어·프랑스어 번역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입국 후 경기도 판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문화인류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어 과외, 언론사 편집일을 하며 2009년부터 작업을 재개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Le plus grand des hasards (By the Most Extraordinary Coincidence) Ink on paper, 100 x 55 cm, 2023 ⓒ심정택 제공
Inner Peace, Ink and gold leaf on canvas 91 x 73 cm, 2024 ⓒ심정택 제공

예술은 어디서든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것

시적인 명징성과 상징성이 녹아있는 브루노가 그려내는 현대적 도시가 배경인 인물 산수화는 자신을 포함한 현대 한국인의 모습이 빼곡히 담겨있다. 그는 시를 그림과 동등하게 캔버스에 적어 넣는다. 그림을 먼저 그리고 글을 쓴다. 한번 쓴 글은 수정하지 않는다. '생각의 사생'을 존중한다.

예술을 비웃는 아웃사이더, 대중의 관심을 유인하는 마케팅의 천재 등 상반된 수식어가 붙는 뱅크시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거리 벽화다. 한국의 거리 벽화는 서구만큼 관심의 대상도, 대접도 받지 못한다. 브루노는 2013년과 2015년에 각각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구 구의취수장)에 벽화 작업을 했다. 2017년에는 서울 자하문 고개마루 술집 벽에 그림을 남겼다. 2023년도에는 거제도 주택 벽에 벽화를 남겼다. 브루노 작가가 16년여 동안 한국에서 이어온 작업을 최근 프랑스 국제방송 TV5Monde에서 방영했는데 이들 또한 벽화에 주목했다. 예술은 어디서든 우리가 아직 모르는 뭔가를 말하며, 아직 규정되지 않은 뭔가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브루노 작가의 개인전 《내면 세계로의 짧은 여행 Inner Worlds》는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미사장 카페 갤러리 1층 독립 공간, 지하 1층 전용 전시장 두 곳에서 6월22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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