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불교계가 이승만기념관 반대"…무슨 일 있었길래
이승만,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유시 발표
불교정화운동 촉발…조계종·태고종 분파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는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이 불교계의 반대가 심하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혀 그 배경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11일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정준호 시의원(더불어민주당·은평4)의 이승만 기념관 관련 질의에 "기념관 건립위원회로부터 이 장소(송현광장)가 최적지라는 요청을 받고 검토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 시장은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이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불교계와 직접 소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표적으로 불교계에서 많은 반대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기념관) 추진위 쪽을 뵐 기회가 있어서 '의견을 달리하는 분들이 계시니 그분들과 직접적인 협의를 해 달라'고 했다"며 "아마 지금 (협의를) 하실 것으로 짐작한다"고 밝혔다.
오 시장의 발언대로 불교계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고 있다.
조계종은 지난 2월28일 성명서에서 "(이 전 대통령이) 이른바 정화 유시로 불교계 분열을 일으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점은 용서하기 어렵다"며 "그가 종교 방송 설립과 군종 장교 제도 도입 등에서 특정 종교에만 특혜를 주고 불교와 천도교 등 민족종교를 차별했다"고 언급했다.
태고종 교임전법사회도 지난해 11월29일 성명에서 "열린송현녹지광장은 대한민국 불교 양대 산맥인 태고종과 조계종이 인접한 대한민국 불교의 맥이 살아있는 대한민국 불교의 성지"라며 "도심 속 시민이 향유하는 공간을 종교간 분열과 불교를 탄압했던 이승만 정권의 표상을 건립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와 서울시의 행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전 대통령은 불교계와 악연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에서는 인구 증가나 승려 결혼을 연결시키는 이른바 '대처식육론'이 각광 받았다. 이에 따라 결혼을 하는 승려들이 크게 늘어났고 이들이 승려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 같은 행태는 중생을 위한다는 대승불교의 지향점과 일치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는 배우자를 둔 대처승 7000여명이 국내 1300여개 사찰을 장악했다. 교단의 재산이었던 각 도 여객회사와 목포의 대광유지, 부평의 베어링공장, 대전과 대구 시내의 백화점과 극장, 전북의 도정공장, 기타 기업체 등을 모두 대처승들이 운영했다. 반면 출가해 독신으로 수행하는 비구승(比丘僧)은 300~500명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은 1954년 5월 사찰 내에서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내용의 유시(諭示)를 내놨다. 그는 이후 1955년 12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7차에 걸쳐 유시를 발표했고 이는 불교정화운동을 촉발시켰다.
유시의 주요 내용은 대처승은 곧 친일 승려이니 사찰 소유권을 내려놓고 절 밖으로 나가라는 것, 그리고 비구승은 곧 애국 승려이니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문화유산인 사찰재산을 지키며 수리 개량하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대통령이 불교 내부 사안에 개입한 것은 사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재헌 금강삼종대학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와 불교정화운동의 전개' 논문에서 "사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특정 종교의 내부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과 망명생활을 했던 이승만이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라는 헌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마치 제왕처럼 명령을 하달하는 식으로 개입한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유시는 식민지 친일 잔재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비구승 중심의 수행 전통 회복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사찰 농지 반환과 사찰 문화재 관리라는 정책적 판단도 있었다.
또 이 전 대통령 자신의 기독교 우위 정책 여파로 정치적 반대파가 된 불교계의 실세 대처 주지들을 제거하고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정략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재헌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대처승 중심의 총무원 세력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급작스럽게 이들을 배제하고 소수파인 비구 측으로 지지 세력을 갑자기 전환했다"며, "대처 측 정치 인사 다수가 한민당과 함께 반(反)이승만 진영으로 합류했고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통령의 대처승에 대한 비판 발언 수위는 유시가 이어지면서 점점 더 높아졌다. 비구승과 대처승이 조계사 탈취 등 문제로 유혈 폭력으로 맞설 때에는 이 전 대통령이 친공·친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대처승을 배제하고 비구승들에게 힘을 실었다.
거듭된 유시에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불교정화운동의 인식과 현재적 의미' 논문에서 "담화를 발표할 당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인사를 대거 정권에 중용하면서도 반일 심리를 반공주의로 연결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며 "당시 한일 간에 독도 문제, 재산권 청구 등을 둘러싼 첨예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반일을 구호로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촉발시킨 불교정화운동을 거치면서 불교계는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내홍에 시달렸다.
1954년 8월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비구승이 교단 운영을 주도한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후 각 사찰에서 비구승과 대처승 간 충돌이 이어졌다.
1954년 겨울 양측이 당시 태고사(현 조계사)에 진입해 '조계사', '태고사' 라는 간판을 떼고 붙이며 난투극을 벌였다. 이곳을 점거해 차지한 쪽이 교단을 대표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사찰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도 이어졌다. 비구승이 대처승에게서 사찰을 인계 받는 과정에서 대처승의 사무 인계거부, 저항, 시간 지연 등이 벌어졌다. 일부 대처승은 자진 환속해 절을 떠나기도 했고 방침에 순응한 일부 대처승은 가정생활을 정리하고 승적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대처승들이 반격을 가했다. 대처승 측은 비구승 측을 관제 불교단체로 규정하고 정교 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대처승 측의 사찰 재진입과 운영권 승소 사례가 빈번해졌고 이에 비구승의 할복 기도와 법원 난입 사건 등이 벌어졌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권은 양측에 자율적으로 불교를 재건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조계종이 성립됐다. 이후 1970년에 대처승 측이 별도로 태고종을 설립해 통합종단에서 탈퇴함으로써 양측의 대립과 분쟁은 봉합됐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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