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케인 울리는 ‘무관의 저주’ [경기장의 안과 밖]
리오넬 메시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끈 뒤 이렇게 말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 이뤄진 성공을 위해 17년을 기다렸다.” 우승은 쉽고도 어렵다. 선수 커리어 동안 무려 40개가 넘는 트로피를 든 그에게 월드컵은 비원(悲願)이었다. 월드컵 우승 여부를 놓고 선배 디에고 마라도나와 비교됐다. 애국자가 아니라며 끊임없이 메시를 압박하는 팬들도 있었다. 월드컵 우승은 그 속박에서 벗어난, 가장 어려운 숙제 같은 우승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는 늘 트로피 근처를 맴돈다.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으면 최상위권 팀들의 영입 대상이 되고, 높은 확률로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얻는다. 주축이 아니더라도 팀의 일원으로 우승 이력을 추가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리그앙의 절대 1강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이강인은 첫해에만 트로피 세 개를 들어 올리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이런 공식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선수가 있다. 기량도 우수하고 우승권 팀에 속해 있는데, 번번이 눈앞에서 트로피를 놓친다. 바이에른 뮌헨의 스트라이커 해리 케인이다. 케인은 현시점 세계 최고의 정통 스트라이커다. 골을 마무리하는 능력과 페널티박스 부근에서 펼치는 연계 플레이가 뛰어난 선수다. 한 시즌 30골과 어시스트 10개를 책임질 수 있는 특급 선수로 꼽힌다.
케인은 토트넘 홋스퍼의 ‘성골’이다. 토트넘 유스에서 출발해 2011년 프로에 입성하고, 팀 역대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에 세 차례 등극했고, 도움왕을 차지한 적도 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쌓은 업적도 화려하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득점왕, 4년 뒤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도움왕에 올랐다. 잉글랜드 A매치 최다 골 기록의 주인이기도 하다.
실력과 개인 기록, 수상 실적 면에서 남부럽지 않은 케인이지만 우승 타이틀 앞에서는 존재감이 작아진다. 단 한 차례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토트넘은 케인이 데뷔하기 4년 전인 2007-2008시즌 리그컵을 마지막으로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케인에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16-2017시즌 맨체스터 시티를 따돌리며 기세를 올렸지만 EPL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8-2019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지만 리버풀에 패해 또 준우승에 그쳤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유로2020 결승 진출을 이끌고도 승부차기에서 이탈리아에 패하며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결국 케인은 지난해 여름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축구 커리어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 토트넘을 떠나 독일 분데스리가의 절대 강자 뮌헨으로 이적했다. 목적은 오로지 우승이었다. EPL 최고의 골잡이라는 타이틀보다 트로피가 간절했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FC 바르셀로나로 떠난 뒤 스트라이커를 아쉬워하던 뮌헨도 팀 역대 최고 이적료인 1억1100만 유로(약 1600억원)을 투자해 케인을 데려왔다.
뮌헨은 유럽 전체에서도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클럽이다. 분데스리가 통산 우승 기록이 32회인데, 2012-2013시즌 이후 11년 연속 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 시기에 DFB 포칼, 슈퍼컵 타이틀도 11회 챙겼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클럽월드컵 우승 1회도 추가했다. 케인 합류 전 11년 동안 무려 25회나 우승했고, 트로피를 놓친 시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케인이 자기 몫만 해도, 아니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무관 징크스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모두가 전망했다.
기대한 대로 케인은 입단 첫해에 자기 몫 이상을 해냈다. 리그 32경기에 출전해 36골을 넣으며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올랐다. 유럽 프로축구 전체에서 최다 득점자에게 주어지는 ‘유로피언 골든슈’도 그의 몫이었다. 챔피언스리그 등 시즌 전체 일정까지 따지면 총 45경기에서 44골 12도움을 올렸다. 한 시즌 40골 이상, 공격포인트 50개 이상은 과거 전성기의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정도가 올렸던 엄청난 기록이다.
새 감독도 무관 징크스에 발목 잡힐까
그러나 축구의 신은 가혹했다. 정든 무대를 떠나는 선택까지 하며 우승을 염원한 케인은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음에도 다시 빈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문제는 뮌헨의 ‘이상 부진’이었다. 우승 팀은 분데스리가에서 뮌헨에 도전할 만한 팀으로 여겨졌던 도르트문트, 라이프치히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지난 시즌 6위에 머물렀던 레버쿠젠이 무패 우승의 역사를 썼다. 레버쿠젠은 차범근과 손흥민이 몸담았던 팀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하다. 공교롭게도 토트넘에서 케인과 ‘영혼의 단짝’으로 지냈던 손흥민의 친정 팀이 케인의 우승 열망을 꺾은 셈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레버쿠젠과 슈투트가르트에 밀려 3위에 그쳤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뮌헨의 도전은 4강에서 멈췄다. DFB 포칼과 슈퍼컵도 쥐지 못했다. 12년 만에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한 시즌이었다. 심각한 부진에 토마스 투헬 감독은 시즌 도중 조기 결별이 발표되는 굴욕을 맛봤다.
케인의 전 소속 팀 토트넘은 우승에 도전하기에 힘이 달리는 팀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토트넘에서 인정받은 선수들이 다른 리그로 옮기면 어렵지 않게 우승 이력을 쌓는다. 얀 페르통언, 키어런 트리피어, 에릭 라멜라, 세르주 오리에 등이 새로운 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심지어 높은 이적료로 토트넘에 합류했다가 팀 내에서 전력 외로 밀리던 탕기 은돔벨레조차, 나폴리로 임대를 간 기간에 세리에A 우승을 맛보았다.
이렇게 되자 케인의 무관 징크스는 일종의 저주라는 ‘밈’이 돈다. 팬뿐만 아니라 미디어까지 동참하는 분위기다. 케인 이적 후 뮌헨이 무관에 그친 것을 두고 다양한 자료를 근거 삼아 진지하게 분석한다. 독일 최고 권위의 축구 매체 〈키커〉는 “케인의 저주가 뮌헨에서 계속됐다. 우승이 익숙한 (뮌헨의) 전통 때문에 이적을 택했지만 케인은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신세다”라고 보도했다. 케인과 같은 시기 토트넘에서 활약한 손흥민도 현재까지 클럽에서 우승 경험이 없다(선수 생활 통틀어 2018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유일한 타이틀이다). 그래도 트로피를 위해 ‘낭만’을 저버리고 이적하지는 않았기에 케인만큼 비아냥의 대상이 되진 않는다.
프로 13년 차를 맞은 케인은 2024-2025시즌 다시 우승에 도전한다. 뮌헨은 투헬 감독과 1년 빨리 계약을 종료하고 새 감독을 찾았다. 1986년생 젊은 감독 뱅상 콩파니가 선임되었다. 세계적 센터백이던 콩파니 감독은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케인을 막으며 잉글랜드에서 열다섯 번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우승에 익숙한 새 감독과 함께하는 케인은 저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아니면 새 감독도 케인의 무관 징크스에 발목이 잡힐까? 케인이 생애 첫 트로피를 드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 화두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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