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아,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독서일기]
임지연 지음
은행나무 펴냄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문학동네, 2010)의 화자이자 여주인공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작가의 이름을 따서 편의상 M이라고 부르게 될 그녀의 현재 나이는 100살이다. 동베를린에서 자라난 그녀는 스무 살 무렵에 결혼하여 약 20년간 결혼 생활을 했으며 다 큰 딸 하나를 두었다. M은 40대 때인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으로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차로 병원까지 옮겨졌다가 정신을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온 M은 스스로에게 “만일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고 묻고,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발작이 일어나고 나서 반 년 뒤에 독일이 재통일되었고, 그로부터 또 반 년 뒤에 M은 자신이 일하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의 새 동료가 된 서독 출신의 40대 유부남 프란츠와 사귄다.
M의 기억은 하나같이 “그해 여름에 날씨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여름이었는지 세 번째였는지, 아니면 마지막 여름이었는지, 프란츠와 내가 단 한 번의 여름만을 함께했는지 아니면 여러 번 여름을 함께 보냈는지”라는 식으로 착종되어 있어, 두 사람이 만난 기간이 일 년인지 수삼 년이었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이런 엉클어진 회고는 M이 기억상실을 겪을 연령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지만 사실은 그녀가 의도한 것이다. 참고로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M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떠났다.
사랑에는 이상(理想)을 같이 나눈다든지, 상대를 위해 나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거나 무엇인가 베푼다는 행위가 동반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었던 매력이나 개성을 서로에게서 발견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M과 프란츠에게는 그런 교환이나 발견이 전혀 없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 많게는 세 번 M의 집에서 섹스를 나누었을 뿐이다. 이것은 사랑이다.
1996년에 발표된 모니카 마론의 이 소설은, 작가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한 섹스를 열정적으로 기록한 아니 에르노의 1991년 작 〈단순한 열정〉(문학동네, 2001)과 공유하는 것이 많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아니 에르노).” “내 연인이 나를 떠난 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누웠던 침대 시트를 벗겨내서 빨지 않고 장롱 안에 보관해두었다. 바탕색이 검은색이라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내 연인의 정액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모니카 마론).” 두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두 쌍은 섹스밖에 하지 않는 사랑을 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사랑이다. 섹스와 사랑이 별개라면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라는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알 수 없는 게 되고, ‘사랑’을 ‘섹스’로 바꾸고서야 우리는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 수고는 불필요하다.
‘이념’을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
두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그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M이 마지막 정사를 나누고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프란츠를 달려오는 버스에 밀어트려 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M이, 아내에게 충실하기 위해 그동안의 관계를 끊으려는 프란츠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리송하게 여긴다. 그녀가 우리에게 자신의 기억을 전달하면서 의도적으로 혼돈과 번복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양심을 무마하지는 못했다. 프란츠를 죽인 M은 그가 잊고 가져가지 않은 근시용 안경을 몇 년 동안이나 일부러 착용하여 자신의 멀쩡한 눈을 못쓰게 만들었다. 문학평론을 하는 나의 친구는 그것을 오이디푸스와 같은 자기처벌로 해석했다.
M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사랑을 했네’라고 강변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임지연의 〈사랑, 삶의 재발명〉(은행나무, 2017)에 따르면, M은 사랑의 ‘이념(idea)’을 추구했지 삶 속에서 실현되는 ‘사랑’에 대해서는 몰랐다. 사랑의 이념은 ‘단둘이서 영원히’이며, 삶 속에서의 사랑은 ‘때에 따라 변한다’이다. M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으로도 불리는데, “낭만적 사랑은 영원을 추구한다.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죽음을 통해 완성하고자 한다”. 낭만적 사랑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죽음이다. 낭만적 사랑을 따르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현세의 변화로부터 몸과 마음의 순수성을 지켜주고 영원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낭만적 사랑이 지향하는 영원성은 감정의 불변성과 같은 말이다.”
〈슬픈 짐승〉같이 유치한 소설은, 이별로 인한 고통을 강도(强度) 높게 표현하면 할수록, 진실한 사랑이 입증되는 것처럼 우리를 호도한다. 실로 이별의 괴로움을 이기고자 문신을 새기는 사람, 알코올의존증이 되는 사람, 극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 종교인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당사자의 인격이나 상황과 연관되었을 뿐(M의 경우 40대의 나이로는 더 이상 다른 연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깊고 진실하게 사랑했는가에 대한 지표는 되지 못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시대에 가장 깊고 진실하게 사랑한 사람은 이별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격변이 M의 삶에 간섭한 세부가 분명히 있고, 프란츠와 M의 관계가 재통일을 주도한 서독과 거기에 흡수당한 동독의 관계를 유비(類比)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세부와 유비도 그녀의 살인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사랑의 광기는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데, “짐승들은 지옥에 가지 않아”라는 그녀의 말은 자학적이다.
자본가들은 대기업의 부(파이)를 먼저 늘리면 그 혜택이 자동적으로 중소기업과 노동자에게 돌아간다고 선전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낙수효과 이론에 일침을 놓았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이론에 따라 윗접시에 물이 차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윗접시가 더 커져버린다.” 낭만적 사랑의 경제학도 그와 똑같다. M과 같은 이들의 접시에는 사랑이 가득 고여도 다른 데로 흘러넘치지 않는다. M의 사랑은 더 많은 사랑을 부르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들지 못한다. 그 결과 이들은 시체를 사랑하게 된다. 100살이 되도록 죽은 프란츠를 사랑하는 M이 증거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아가 이것은 좋은 소설이 아니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