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끗발이 개 끗발”…이젠, 한국차도 독일차도 ‘싸고 좋은 2천만원대’ 승부수 [세상만車]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gistar@mk.co.kr) 2024. 6. 16.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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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전기차 산다더니
요즘엔 하이브리드가 대세
전기차 캐즘, ‘독 아닌 약’
올해 안으로 출시될 예정인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사진출처=현대차]
‘첫 끗발이 개 끗발’

도박판에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처음에 잘 나가다가 완전히 망하게 될 때 사용합니다.

타짜가 아닌 이상 초반에 돈을 딴 기분에 함몰됐다가 결국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타짜들도 더 큰 돈을 먹기 위해 상대방의 첫 끗발에 ‘밑장빼기’ 작업합니다.

‘개 끗발’은 초심을 잃거나 욕심을 부리는 일을 조심하라는 ‘경계의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도박판이 아니더라도 개 끗발이 되면 슬럼프가 따라옵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예상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뒀을 때 슬럼프의 크기와 강도도 비례해 커지고 강해집니다.

도박판에서 밑장빼기하는 장면 [사진출처=영화 타짜 캡처]
요즘 자동차업계의 화두가 된 전기차(EV)의 ‘캐즘’(Chasm)도 따져보면 슬럼프입니다.

캐즘은 ‘일시적 성장 정체’라는 뜻으로 줄여 사용합니다. 원래 지질학에서 깊이 갈라진 틈이나 작은 협곡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단절, 중단입니다.

경제학에서는 첨단 기술이나 상품이 개발돼 출시된 다음, 초기 시장과 주류 시장 사이에서 수요가 일시적으로 정체·후퇴하면서 단절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캐즘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품, 음식, 프랜차이즈 등이 이름값 또는 ‘쿨’(Cool)하다는 이미지에 힘입어 초반 반짝 인기를 얻은 뒤 성장을 멈추는 것도 캐즘에 해당합니다.

캐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일시적 정체’가 아니라 ‘폭망’(폭삭 망함)합니다.

테슬라 따라하다가 “울고 싶어라”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 모델3 [사진출처=매경DB, 테슬라]
자동차 업계에서는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일으킨 ‘전기차 혁명’이 주춤하는 현상을 캐즘이라고 부릅니다. ‘캐즘의 덫’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테슬라 모델3가 주도한 전기차 붐은 벤츠, BMW, 폭스바겐, 볼보, 현대차, 기아 등이 잇달아 가세하면서 ‘혁명’이 됐습니다. 전기차 이전에 친환경차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하이브리드(HEV) 입장에서는 ‘쿠데타’이겠지만.

테슬라는 모델3와 모델Y로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차지했습니다. 테슬라 마니아인 테슬람(테슬라+이슬람)의 역할이 컸습니다. 테슬라는 ‘돈 되는 투자처’로 더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쿨한 테슬라 차량을 타면 시대를 앞서가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유행과 신제품에 민감한 얼리어답터 테슬람과 여유가 있는 부유층이 적극 구매했습니다.

상품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생각에 특정 계층의 소비를 따라하는 파노플리 효과가 불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남들이 좋다거나 유행하는 제품을 따라 사는 양떼·편승 효과도 뒤따라 발생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테슬라 선전에 전통 자동차 브랜드들은 당황했습니다. 배터리 성능, 충전 인프라스트럭처 등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속도조절을 하던 중 끗발(영향력)을 잃을까 걱정합니다.

서둘러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테슬라와 경쟁할 비싼 전기차들을 선보였습니다. 여기에 내연기관 차량에 불리한 환경규제와 유인책인 보조금이 가세하면서 전기차는 대세가 됐습니다.

국내에서 인기높은 쏘렌토 하이브리드 [사진출처=기아]
서둘러 먹으면 체한다고 하죠. 초기 수요가 충족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충전 고통, 화재 걱정 등으로 ‘사면 고생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전기차에 밀려 퇴물 취급받던 하이브리드가 다시 친환경차 대세가 됐습니다. 국내에서도 하이브리드는 전기차보다 더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하이브리드 리더인 일본 브랜드 토요타와 혼다도 모처럼 웃고 있습니다.

기존 자동차 브랜드들도 ‘속도 조절’에 나서고 새로운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전기차 캐즘은 더 심해졌습니다.

역시 전기차 리더인 테슬라는 달랐습니다. 한발 빨랐습니다. 모델3 가격에 적용했던 5999만원에서 알 수 있듯이 보조금을 1만원까지 알뜰살뜰 챙기는 ‘999’ 가격책정을 펼쳤던 노하우 때문일까요.

잘 팔릴 때는 가격을 바로 올리고, 판매가 주춤하면 바로 내리는 ‘고무줄 가격’으로 수익을 극대화했습니다.

테슬라에 발생할 캐즘을 늦췄습니다. 고무줄 가격도 효력이 떨어지자 값싼 중국산 모델Y로 다시 승부수를 걸었습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1~5월 국내에서 중국산 모델Y는 벤츠 E클래스, BMW 5시리즈를 제치고 전기차를 넘어 수입차 판매 1위가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테슬라 모델Y [사진출처=테슬라]
테슬라 입장에서는 고무줄 가격과 중국산 모델Y가 커지고 세지는 손오공의 여의봉입니다.

반면 테슬라를 너무 사랑해 비싼 가격에도 ‘지금이 가장 싸다’는 남들의 말을 믿으며 구입한 소비자들은 호구로 전락했습니다. “나는 테슬라 탄다”는 자부심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집 다음으로 비싸다는 중고차의 잔존가치가 떨어지는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잔존가치가 높아야 돈이 됩니다. 잔존가치가 떨어지면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미국 경제매체인 CNBC는 최근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아이씨카스의 통계를 인용해 지난 3월 기준 중고가 가격을 보도했습니다.

이 기간 평균 중고차 가격은 작년보다 3.6% 떨어졌습니다. 테슬라 중고차 가격은 평균 28.9% 폭락했습니다. 전체 자동차 브랜드 중 가장 많이 하락했다고 하네요.

전기차 대안으로 주목받는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 [사진촬영=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국내에서도 테슬라 중고 가치는 하락 추세입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중고차 도·소매 데이터로 잔존가치와 시세를 산출하는 밸류어블 카스탯(CAR STAT)에 의뢰해 지난 4월 기준 잔존가치를 분석해 본 결과입니다.

출시된 지 2년 이상, 주행거리 4만km 기준으로 주요 차종의 잔존가치를 알아보면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81.5%로 나왔습니다. 올해 1월 잔존가치 80.8%보다 오히려 올랐습니다.

토요타 캠리 하이브리드는 78.9%,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78.4%를 기록했습니다. 중국산 모델 투입으로 중고차 가치에 타격을 입은 테슬라 모델Y는 69.9%, 모델3는 70.6%로 나왔죠.

전기차 판매가 줄고 신차 판매에 영향을 주는 잔존가치까지 떨어지자 테슬라 따라하기에 나섰던 기존 자동차 브랜드들은 또다시 당황했습니다.

전기차 올인(all-in)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전기차’ 대신 ‘전동화 차량’이라는 표현으로 먹거리 전략을 바꿨습니다.

전기차 대세가 다시 오기 전까지 하이브리드와 같은 전동화 차량에도 공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캐즘, 자동차 브랜드에 ‘자아성찰’ 계기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인기높은 폭스바겐 ID.4 [사진촬영=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자동차 브랜드들을 울게 만든 캐즘은 과연 악재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호재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운 것처럼 ‘테슬라 따라하기’에서 벗어난 자동차 브랜드들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차종을 내놓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을 주도했던 브랜드들은 소비자의 취향과 운행 패턴에 맞춘 전동화 차량으로 테슬라를 뛰어넘는 도약을 추진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슬럼프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높인 전기차도 적극적으로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배터리 업계도 주행거리는 물론 안전성도 높이고 소비자 선호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선보이고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호재입니다.

전기차 대중화를 이끌 폭스바겐 ID.2 올 콘셉트카 [사진출처=폭스바겐]
요즘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화두는 ‘갓성비’(god+가성비) 전기차입니다. 국내에서 ‘국산차값 수입차’로 인기높은 폭스바겐이 선두에 섰죠.

폭스바겐이 지난 2022년 한국에 처음 선보인 전기차인 ID.4는 기아 쏘렌토와 현대차 싼타페를 살 수 있는 4000만원대에 구입할 수 있는 독일차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전계약에 들어가기 전 입소문만으로 3500대 이상 실적을 올리더니 출시 2주 만에 초도 물량이 완판되기도 했습니다.

올해에도 수입차 중 가장 많은 국고 보조금, 가격 대비 우수한 안전·편의사양, 하이브리드보다 알뜰한 유지비로 지난 4월에는 유럽 전기차 중 가장 많이 판매됐습니다.

폭스바겐은 내년에는 3000만원대 ID.2, 2027년에는 2000만원대 ID.1을 출시할 계획입니다.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들의 테스트 마켓 역할을 하는 한국에도 당연히 내놓겠죠.

가성비 높은 전기차인 기아 레이 EV [사진출처=기아]
안방 주인인 현대차그룹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아반떼값에 살 수 있는 전기차를 공격적으로 내놓을 예정입니다.

현재 현대차그룹을 대표하는 2000만~3000만원대 전기차는 기아 레이 EV입니다. 올해 1~5월 4936대가 판매됐습니다.

국산 전기차 중 현대차 아이오닉5(5294대) 다음으로 많이 팔렸죠. 기아 전기차 대표주자였던 EV6(3875대)는 제쳤습니다.

인기 비결은 가성비를 뛰어넘은 갓성비에 있습니다. 레이 EV 가격은 2745만~2955만원입니다. 풀옵션을 선택하면 3080만원에 달하죠.

국고 보조금은 452만원입니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까지 포함하면 2000만원 안팎에 구입할 수 있죠.

경차와 전기차는 궁합이 잘 맞는다는 평가도 인기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경차는 세컨드카 시장에서 가장 선호되는 모델입니다. 연료효율성이 뛰어나고 주행거리가 짧고 주차도 편하기 때문이죠.

전기차와 결합하면 경차의 장점은 더 부각됩니다. 1회 충전 주행거리는 복합 기준으로 205km로 짧은 편이지만 세컨드카나 출퇴근용도로 사용한다면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캐스퍼 일렉트릭 티저 [사진출처=현대차]
레이 선전을 보면서 현대차도 뛰어들었습니다. 레이와 경쟁하는 동시에 경차 시장 파이도 키우고 있는 캐스퍼를 올해 중 전기차로도 출시할 계획입니다.

오는 27일 부산 모빌리티쇼 프레스데이에서 최초 공개될 캐스퍼 일렉트릭은 ‘차급을 뛰어넘는 혁신’이라는 현대차 표현처럼 경차 이상의 크기와 사양으로 출시될 전망입니다.

1회 주행거리는 315km로 레이 EV보다 깁니다. 세컨드카는 물론 퍼스트카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차도 캐스퍼 일렉트릭이 국내 전기차 시장의 대중화를 선도할 기준이 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기아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도 내놨습니다. 사전계약을 받고 있는 EV3입니다.

EV3는 1회 충전으로 350km를 주행하는 스탠다드 모델, 501km를 달릴 수 있는 롱레인지 모델로 구성됐습니다.

가격은 각각 3995만원, 4415만원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주는 보조금(서울시 기준 830만원)을 고려하면 실 구매가는 3000만원대가 됩니다.

뭣이 중한지 파악해야 ‘개 끗발’ 탈출
임영웅의 뭣이 중헌디 [사진출처=유튜브 캡처]
전기차 캐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슬럼프도 스트레스처럼 독이 아니라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슬럼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렸겠죠.

소비자도 이전보다 더 현명한 구입 전략이 필요합니다. 차종이 다양해져 고르는 재미가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골라야 하는 고민을 더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듯이 자신이 원하는 차량이 아닌 남이 원하는 차,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차에 눈길을 주면 자신도 모르게 편승·양떼 효과의 밑장빼기에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차가 아닌 남이 원하는 차를 사면 결국 ‘첫 끗발이 개 끗발’이 됩니다. 차종이 다양해 진 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재미가 고민을 넘어 고통으로 변질된다는 뜻이겠죠.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동차 구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알고 남이 아닌 자신에게 필요한 차를 알뜰하게 구매하는 ‘지차지기’(知車知己)로 ‘개 끗발’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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