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발레리나이긴 하지만 무대에 올리기는 좀”…클래식 음악계서 사라진 ‘이 사람들’ [지식人 지식in]

오수현 기자(so2218@mk.co.kr) 2024. 6. 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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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가 공연 금지 움직임
우크라 전쟁 이후 3년째 지속
친푸틴 발레리나 자하로바 공연 취소
푸틴의 친구 게르기예프 자취 감춰
정치와 예술의 상관성 놓고 ‘논란’
러시아 발레리나 자하로바의 ‘모덴스’ 공연 홍보 사진
“전범 국가의 예술가를 무대에 세울 수 없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러시아 음악가들이 실종됐습니다. 2022년 발발해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 때문입니다. 전세계 공연계가 러시아 음악가를 무대에 세우는 것이 마치 현 국면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는 제스처로 인식될 수 있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지난 3월 내한 예정이었던 러시아의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공연 ‘모댄스’가 취소됐습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자하로바는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여겨지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두 차례 수상한 세계 정상급 무용수입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통합러시아당 일원으로 연방의원을 지냈고, 러시아 국가예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친푸틴 예술가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은 이번 공연이 예고되자 “침략 국가의 공연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과 같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죠.

푸틴의 친구이자 거장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2022년 3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술활동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았습니다. 원래 이 공연 무대에는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오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임박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이에 주최 측은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가 지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합병을 지지한 것을 명분 삼아 이들 섭외를 취소했습니다. 빈필하모닉은 오스트리아 연주단체이니 그대로 연주를 했고요. 결국 마추예프 대신 한국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대타로 무대에 올라 훌륭한 연주를 선보여 호평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움직임이 정당할까요. ‘예술과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라고 생각하진 않으신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같은 공연계의 모습을 두고 ‘비겁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유대인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200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는데,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19세기 작곡가인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로 유명했고, 또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음악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갈 때 흘러나왔던 음악이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의 ‘순례자의 합창’이었고, 또다른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중 ‘발퀴레의 기행’은 나치의 군대 행진곡이었습니다. 바그너 음악이라면 유대인들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이유죠.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그런 바그너의 음악을 예루살렘에서 연주를 했으니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게 당연했습니다. 이스라엘 의회의 사과 요구에 바렌보임은 “바그너 연주를 잘하지 못했다면 사과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술과 정치는 구분돼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한 것이죠.

그렇다면 바렌보임의 이같은 모습은 용기있는 예술가의 올바른 행동일까요. 그의 바그너 연주는 소신일까요, 쇼맨십일까요. 어떤 시각으로 이같은 행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각은 다르겠지만 저는 쇼맨십에 다소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인간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질 수 있을까요. 예술은 정치, 사회, 경제에서 완전히 독립되고 동떨어진 고고한 영역일까요. 그렇게 단언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예술 또한 세상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일 뿐이고 여러 영역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죠.

예술을 사랑한 정치인, 성직자, 재력가들이 없었다면 클래식 예술이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었던 루돌프 대공은 또다른 귀족 둘과 함께 베토벤에게 25년여 간 매년 40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했습니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0만파운드, 우리돈으로 1억7000만원 정도입니다. 베토벤은 안정적인 후원금 덕분에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인류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남길 수 있었죠. 또 베토벤은 한때 나폴레옹을 새 시대를 열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교향곡 3번 <영웅>을 썼습니다(이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실망한 베토벤은 악보를 갈기갈기 찢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술가들도 특정 정치 집단, 계층으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하고,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는 사회의 구성원인 셈입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하다”, “어떤 예술행위를 하든 비판은 사절금지”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 바그너와 히틀러
앞서 언급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힙니다. 푸틴과의 좋은 관계 덕분에 그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고, 그 덕분에 윤택한 삶을 누리는 단원들은 게르기예프에게 충성합니다. 게르기예프가 2021년 마린스키 앙상블을 이끌고 내한했을 당시 하루에 2차례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하루 2차례 공연은 클래식 공연계에선 있을 수 없는 살인적인 일정입니다. 공연 전 리허설 등 공연 준비와 공연 후 연주자들의 체력 고갈을 감안할 때 무리한 강행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린스키 단원들이 이런 고강도 일정을 묵묵히 수행한 것은 푸틴을 뒷배로 두고 있는 게르기예프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게르기예프를 연주 무대에 세우지 않은 카네기홀 연주회의 결정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그너 음악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유대인의 비극적 역사를 감안할 때, 바렌보임의 예루살렘 바그너 연주 강행은 학살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폭력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겠죠. 참고로 바렌보임은 2011년 내한 당시 DMZ 인근 임진각에서 연주를 했었습니다. 갈등의 상황을 예술로 치유하는 음악가라는 위상을 갈구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여담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연주되지 않고 있을까요.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의 출연이 취소된 빈필하모닉의 카네기홀 공연에서 대타로 오른 조성진이 연주한 작품은 원래 프로그램 그대로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습니다. 사망한 인물에게까지 현 정치적 상황을 덧씌우는 것은 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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