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선전포고하더니 1등 차지한 ‘이것’ 새 역사 썼다는데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6. 1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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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이 상식이라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이라서요.”

지난해 드라마 시청률 순위 5위(16%)를 기록한 ‘대행사’의 한 장면입니다. 드라마 ‘대행사’는 지방대 출신 흙수저인 주인공 고아인(이보영 扮)이 극중 업계 1위의 광고대행사(VC기획)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대표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뤘습니다.

이보영 조성하 등 배우들의 열연과 흙수저 성장물이라는 콘셉트로도 인기를 끌었지만, 주요 장면마다 말장난 같으면서도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공감할만한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적절하게 배치돼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팬들은 엔딩크레딧을 백미로 꼽습니다. 주인공은 결국 그토록 바라던 대표 자리에 오르지만, 홀연히 퇴사해 작은 독립 대행사를 차립니다. 상식 밖의 행보에 동고동락한 직장 동료가 ‘사람들은 고아인이 대표로 승진하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을텐데요?’라며 의아해하자, 주인공이 되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되묻죠.

“사람들의 생각이라…내 한계를 왜 남들이 결정하지?”

지난 5월23일 서울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 20주년 기념 행사.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고향과 출신 고교, 대학, 심지어 부모님의 직업을 따지고 그 속에서 사람의 가능성을 가늠해 판단하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 유쾌한 일침을 날리면서 대리 만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일 겁니다.

어느 산업이나 후발주자에게 고정관념과의 싸움은 필연적입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지 못하면 결국 아류에 그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벽이 너무 공고해 수십번 도전해도 넘기 힘들다는 점이죠. 하지만 뛰어넘기만 한다면, 그 분야의 새 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와인 업계에서도 수십년에서 수백년 간 이어진 수많은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신대륙의 와인들은 복합미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해 만족도(가성비)가 좋다’ 등이죠.

오늘 와인프릭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온몸을 부딪쳐서 저항한 칠레 와이너리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Viñedos Familia Chadwick)의 에두아르도 채드윅(Eduardo Chadwick) 회장과 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는 지난달 베를린 테이스팅(Berlin tasting) 2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습니다.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의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 지난 5월 올해 코리아 앰버서더 중 하나이자 2010 익스클루시브 에이전트인 에노테카 코리아 주최 갈라 디너에서 자신의 플래그십 와인 비녜도 채드윅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전형민 기자]
파리의 심판과 베를린 테이스팅
와인 업계에서 파리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은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1976년 와인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벌인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에서 당시 세계 최고 와인으로 손꼽히던 프랑스 와인들을 신흥 와인 생산국이던 미국 와인들이 꺾은 일이죠.

베를린 테이스팅은 파리의 심판에 감명을 받은 비녜도 파밀리아 채드윅(Vinedos Familia Chadwick)의 채드윅 회장이 2004년 기획한 또 다른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벤트입니다.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 36명의 와인 평론가, 바이어 등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열었는데, 채드윅 회장이 만든 비녜도 채드윅(Vinedo Chadwick) 2000 빈티지가 샤또 마고, 샤또 라피트로칠드, 샤또 패트뤼스 등 프랑스의 유명 와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했습니다.

쉽게 말해 계급장을 떼고 한판 붙었더니, 하극상이 벌어진 셈이죠. 이 사건은 파리의 심판과 함께 현대 와인 역사에 획을 긋는 놀라운 사건으로 회자됩니다.

2004년 베를린 리츠칼튼 호텔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 당시 모습.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고정관념과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
나쁜 결과는 좋은 결과를 덮기 쉽습니다. 첫 행사에서 좋은 결과에 도달했더라도, 한번만 삐끗하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수 있죠.

그럼에도 채드윅 회장은 런던, 뉴욕, 도쿄, 홍콩, 서울 등 전세계의 주요 대도시에서 계속 블라인드 테이스팅 행사를 이어갑니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지난 2008년과 2013년 두 차례 행사가 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굳이 계속 여러 도시에서 심판을 이어간 것에 대해 그는 “그것은 고정관념과의 싸움이었다.(That was a fight against stereotypes.)”고 말합니다. 베를린 테이스팅이라는 상징적인 이벤트를 겪고 난 후에도 고정관념은 여전했기에,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세계를 돌며 증명해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칠레 와인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그는 “베를린 테이스팅인 비단 비녜도 채드윅 뿐만 아니라 칠레 와인이 세계 무대에서 주목을 받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비녜도 파밀리아 채드윅에서 생산하는 와인들. 왼쪽부터 비녜도 채드윅, 세냐, 카이, 돈 막시밀리아노.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아버지에게 바치는 와인
채드윅 회장이 자랑하는 와인, 비녜도 채드윅은 그의 아버지 돈 알폰소 채드윅(Don Alfonso Chadwick)에게 헌정하는 와인입니다. 칠레 대표팀을 19번이나 우승으로 이끌 정도로 역사적인 폴로 선수였던 그의 아버지가 사랑한 개인 폴로 경기장, 그곳을 갈아 엎어서 포도나무를 심고 그 과실로 양조한 와인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가 평생 사랑한 그 땅이어야 했을까요? 그 땅은 바로 칠레의 핵심 와인 산지인 마이포(Maipo) 밸리의 보조 지역(Sub region)인 푸엔테 알토(Puente alto) 입니다.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가까운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죠.

큰 일교차는 포도가 산미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성숙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긴 성숙 기간은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알마비바(Almaviva), 돈 멜초(Don Melchor) 등 칠레의 유명 와이너리들이 다수 이 지역에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비녜도 채드윅이 생산되는 마이포 밸리 푸엔테 알토 지역의 지도.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둥근 자갈이 포함된 충적토도 와인 비녜도 채드윅의 깊고 복합적인 맛을 끌어내는 중요한 떼루아 입니다. 이곳의 토양은 다양한 크기의 둥근 자갈로 구성된 거친 충적물 위에 점토와 양토가 50~70센티미터 정도 덮은 형태인데요.

수천년에 걸쳐 토양과 자갈에 축적된 높은 수준의 탄산칼슘은 포도에 신선함과 균형감, 미네랄을 부여하고, 복합미를 더해 줍니다.

아쉽게도 채드윅 회장의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심고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드윅 회장은 1999년 이 땅에서 자란 포도로 첫 와인을 만들면서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로 비녜도 채드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포도 재배 면적이 불과 축구장 15개 크기인 15헥타르(㏊)에 불과해 한 해에 1만병만 생산하죠. 보르도의 5대 샤또들이 대략 12만~20만병 정도를 생산하는 것에 비하면 한참 적은 양입니다.

비녜도 채드윅 양조세 사용되는 포도가 자라나는 포도밭.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20년 전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은 자신의 실력(와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 실력만 가지고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의하는 남들의 시선, 고정관념으로부터 싸워왔죠.

이제 남들의 시선은 어느 정도 바뀌었습니다.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칠레 와인을 마냥 단순한 가성비의 저가 와인으로 바라보지 않으니까요.

베를린 테이스팅을 통해 칠레 와인의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한지 어느 새 20년, 채드윅 회장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는 “안목 있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이 성과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구자로서 칠레 와인의 탁월한 품질과 다양성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라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칠레 와인에 대한 시선이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 5월23일 서울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 20주년 기념행사.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 제공]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문득 ‘지금 다시 베를린 테이스팅을 벌인다면 똑같은 결과를 장담할 수 있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잠시간의 고민도 없이 “당연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한번 더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몇 번이고 다시 시음회를 열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 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이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좌절하기도 하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과소평가되기도 하죠.

그럴때 비녜도 채드윅의 베를린 테이스팅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주어진 세상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력으로 도전한 역사 속에서 어쩌면 다시 일어나 뛸 힘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대행사 마지막화 제목·윈스턴 처칠)

*이번주 와인프릭은 지난달 22일과 23일에 걸쳐 만난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과의 식사, 인터뷰를 재구성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준 채드윅 회장과 비녜도 채드윅의 코리아 앰버서더이자 2010 익스클루시브 에이전트인 에노테카 코리아, 베를린테이스팅 20주년 행사를 기획한 와인 종합 콘텐츠 와인인에 감사를 표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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