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여왕’도 부담 느낀 27년 만의 무대…연극 ‘벚꽃동산’ 전도연 “연기 뽐내려 선택한 것 아냐”

이강은 2024. 6. 1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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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각색한 연극 ‘벚꽃동산’에서 주인공 송도영 역
“전도연은 연기 잘한다’는 건 모두가 알아”…“나를 온전히 내던지는 용기가 필요”
처음엔 스톤 연출의 ‘쪽대본’과 실수 권장 작업 방식에 불만·불안…“하다 보니 흥미롭고 자극돼”
스톤 연출과 영화 ‘밀양’의 이창동 감독처럼 “나도 모르는 내 모습 끄집어내 주는 감독들이 좋아”
박해수, 손상규 등 “‘우릴 믿고 실수해도 괜찮아’” 해주는 동료 배우들의 격려 큰 힘”
스톤의 ‘한국의 메릴스트립’ 평가에 “내가 좀 더 예쁘지 않나요?”…“소주 광고 모델 하고 싶다” 웃음
‘칸의 여왕’에게도 27년 만의 연극 무대 도전은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인 데다 아무리 연기력에 자신이 있어도 영화, 방송 드라마와 달리 매 공연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관객 앞에 드러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다. 첫 공연과 다름 없던 프리뷰(시사회)를 앞두곤 ‘왜 연극을 한다고 했는지’ 자신을 책망할 만큼 무대에 오르는 게 무서워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공연 후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에 뿌듯했다. ‘내가 뭔가 잘해냈구나’란 생각과 함께. 매일매일 두려움과 긴장감을 이겨내면서 관객 모두와 고스란히 호흡할 수 있는 연극의 매력에 다시 빠져든 순간이다.
지난 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에서 주인공 송도영 역으로 열연 중인 전도연(51) 얘기다. 11일 LG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전도연은 연기 잘한다’는 건 모두가 알지 않나. 그런 걸 뽐내려 했다면 연극 무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온전히 나를 내던지는 용기가 필요했다”며 연극 ‘리타 길들이기’ 이후 27년 만에 무대에 오른 소감을 밝혔다. 이어 개막 공연을 본 설경구, 황정민 등 동료 배우들이 “굉장한 자극을 받았다. 피가 끓고 무대 위에서 같이 즐기고 싶다”고 했다는 평을 전하며 “우리의 공연이 다른 배우들에게 자극을 준 것 같아 힘이 된다”고 덧붙였다.
연극 ‘벚꽃동산’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벚꽃동산’은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마지막 작품인 동명 희곡을 호주 출신 세계적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각색한 것이다. 스톤은 귀족 몰락과 신흥 자본가 부상 등 급변하던 러시아 제정 말기 이야기를 다룬 원작을 파격적으로 비틀었다. 급변기인 2024년 한국 서울을 배경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의 재벌 3세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바꿨다. 그런 만큼 원작과 서사 구조는 물론 등장인물의 성격과 대사, 극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 아예 새로운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다. 

극 중 송도영은 원작의 몰락한 여성 지주 ‘류바’에 해당한다. 남편과 아들이 죽은 후 미국 뉴욕으로 떠나 술과 남자에 취해 살던 제벌 3세 도영이 5년 만에 돌아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할아버지 때부터 일궈온 대기업은 도산 위기에 처하고, 아버지에게서 16살 생일선물로 받은 저택마저 잃게 생겼지만 도영은 전혀 게의치 않는다. 알코올 중독에 현실 감각은 떨어지고, 딸들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딸 남자친구와 키스까지 하는 등 철도 개념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밉상이라기 보다 오히려 연민을 일으키고 어떨 때는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오롯이 전도연의 힘이다.

지난 4월 제작발표회 당시 “여자 주인공 역할이 어려워 한국의 메릴 스트립 같은 전도연이 꼭 필요했다. 어떤 짓을 해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며 스톤이 밝힌 전도연 캐스팅 이유를 무대 위에서 입증한다.  
연극 ‘벚꽃동산’의 주인공 송도영 역으로 27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선 배우 전도연. Studio AL·LG아트센터 제공
전도연은 당초 ‘벚꽃동산’ 출연을 거절하려다 스톤이 한국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이라고 해 마음을 바꿨다. “출연 제의를 받고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읽었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세계적인 명작임에도 제 취향과 맞지 않아 거절하려고 했는데 스톤이 한국적인 재해석을 한다는 말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어 스톤이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창한 연극 ‘메데아’ 공연 실황 영상을 본 뒤 배우로서 피가 끓어 출연을 결심했단다.  
하지만 대본도 완성되지 않은 채 모든 배우가 캐릭터에 대한 숙지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 채 연습이 시작돼 당혹스럽고 힘들었다. “송도영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특히 딸들에게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전가하는 엄마의 모습이 가장 그랬습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어떻게 관객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연기에 관한한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쪽대본(시간에 쫓긴 토막 대본)이 예사인 스톤의 작업 방식도 너무 낯설고 불안했다. “처음엔 대본이 (제때) 나오지 않아 불만도 표출했어요. 그런데 스톤이 ‘난 원래 이렇게 일한다. 공연 한 시간 전에 (대본이) 나올 수도 있다’ 하니 무서워서 더 이상 말 안했어요. 그러고 나서 주는 대본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다들 ‘글을 참 잘 쓴다’고 했습니다.”(웃음) 
전도연은 “사이먼은 배우들이 불안정 속에서 뭔가를 찾아가며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기를 바란 것 같다. 실수에서 나오는 새로움을 즐기라고 계속 요구했다”며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은 아니지만 흥미롭고 저 자신에게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스톤이 저에게서 어떤 모습을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송도영을 납득가게 그려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도영이 죽은 아들의 과외 교사였던 변동림 (남윤호 분)을 오랜만에 만나 “당신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군요. 나는 비껴간 것 같은데”라고 할 때 관객들이 자연스레 ‘맞아 맞아’하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앞서 스톤은 올초 일주일간의 워크숍을 열어 배우들이 자유롭게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 뒤 ‘벚꽃동산’ 등장인물에 각 배우의 특성을 입힌 이야기를 구상했다. 첫 대본을 받은 전도연은 “대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송도영이란 캐릭터를 떠올렸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저 자신은 모르지만, 제 안의 어떤 한 부분이 도영과 닮은 데가 있나 봐요. 예전에 이창동 감독님께 ‘밀양’(2007년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에 왜 저를 캐스팅했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감독님께선 ‘모성 본능이 뛰어나 보였다’라고 하셨어요. 그땐 아이도 없고 결혼도 하기 전이었는데. 저조차 알 수 없는 부분을 끄집어내 주는 (이창동, 스톤 같은) 감독들이 좋아요. 작품을 통해 저를 발견해나가고 싶거든요.”
전도연은 선대 회장을 모시던 운전기사의 아들이자 성공한 사업가로 도영의 회사와 집을 인수하는 황두식 역의 박해수와 무능하지만 심성이 여린 오빠 송재영 역의 손상규 등 연극 무대 경험이 많은 동료 배우들에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무대가 너무 오랜 만이라 실수할까 불안했는데 ‘우리를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격려해줘 큰 힘이 됐어요. 아직은 관객과 시선을 마주치며 무대를 즐길 정도는 아니지만 공연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면서 연기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공연에서도 실수하겠지만 만회하려 노력할 거고, 그렇게 또 성장하고 싶어요.”
그는 스톤이 자신을 ‘한국의 메릴스트립’으로 극찬한 것에 대해선,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모르겠다”며 “메릴스트립은 나와 다른 배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트립은 너무 훌륭한 배우지만, 저와 결이 달라서 훨씬 완벽주의자 같아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저는 좀더 열려 있고 싶거든요. 그리고 메릴스트립보단 제가 좀더 예쁘지 않나요.(웃음)”
음주 연기가 하도 자연스러워 주류 업체의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 묻자 “정말 소주 광고 모델은 한번 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영화·오페라를 오가며 세계에서 가장 바쁜 스타 연출가가 각색·연출하고 전도연이 출연한 화제성 등에 힘입어 7월7일까지 공연이 예정된 ‘벚꽃동산’의 좌석(약 1300석) 예매율은 90%에 달한다. 
‘벚꽃동산’은 내년 3월 호주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해외 순회 공연(월드 투어)도 추진 중이다. 전도연은 “해외에 작품이 초청되면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다. 참여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다”며 “연극은 좋은 작품이 제안 오면 또 할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무거운 작품을 많이 한 만큼 연극은 재미있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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