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손으로 한땀한땀…한국 자수의 탄생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기획전
남녀 가리지 않았던 자수 예술
일본 유학파, 신식 자수 가르침
여성 사회 참여, 경제적 자립 도모
전통 자수 복원한 장인도 나타나
아직 다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속으로 다음에 한번 더 올 날짜를 헤아리게 되는 전시가 있다. 취향에 꼭 맞는 작품과 맞닥뜨린 때도 있지만, 생각보다 볼 것이 많아서 차분히 한번 더 봐야겠다는 조바심이 들 때도 많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기획전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8월4일까지)이 바로 그런 전시다.
한국 자수 발전의 다양한 경로
그동안 전통 자수에 비해 덜 알려져 있던 근현대 시기 자수를 조명하는 이 전시는 125년이나 되는 긴 타임라인을 아우른다. 조선이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해 자수 병풍과 활옷 등을 소개했던 1893년부터 서울공예박물관에 대량의 자수 컬렉션이 기증된 2018년까지. 기관 60여곳과 개인 소장가들이 지닌 자수와 수본, 회화 170여점과 아카이브 자료로 촘촘하게 꾸려진 전시실을 돌다 보면 눈길과 발길이 점점 분주해진다.
1층에서 전통 자수와 문화유산, 2층에서 근현대 자수 작품을 담은 대조적인 구성으로 관람객이 직접 우리 자수의 계보 속을 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역사책이나 미술사 책을 읽듯이 한 줄기로 일목요연하게 이어지는 흐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시 안에 추려진 자수의 역사는 족보로 치면 직계가 아닌 방계혈족들을 기록한 것에 가깝다. 오늘날의 전통 자수는 꾸준히 이어지면서 차츰 현대화된 것이 아니라, 여러 흐름이 각각의 성쇠를 겪는 과정에서 다시금 그 중요성이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근현대 자수는 잘 몰라도 전통 자수는 보고 들어서 안다는 믿음도 재고하게 한다. 전통 자수는 궁궐과 민가의 여성들이 만들던 것이라는 선입견은 평안도 안주 지역에서 활동한 남성 자수 장인들의 존재로 깨진다. 근대 자수 작가들을 통해 전통 자수가 쭉 이어졌을 것이라는 어림짐작은 이들이 일본 유학파라는 사실로 무너진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런 다양한 흐름이 개항과 근대화, 산업화, 전쟁과 분단 같은 사회 변화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생겨났다는 점이다. 전통 자수의 귀중함에 대한 인식은 산업용 공예품이 인기를 끌던 경공업 시대에 나타났다.
전시는 우선 19세기 전통 자수와 일제강점기 유학파 작가들의 활동을 소개한다. 이는 광복 후 예술 작품과 판매용 공업품이라는 두 갈래로 나뉘어 발달한 한국 자수의 궤적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추적하는 단서가 된다. 전통 자수들 사이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 두점이 있다. 첫째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수 준이종정도 병풍’으로, 고급 재료인 남청색 공단에 금색 명주실로 준(尊, 긴 항아리), 이(彝, 물·술 담는 그릇), 종(鐘), 정(鼎, 다리가 세개인 솥) 등 고대 중국의 청동 제기의 그림과 설명을 수놓은 작품이다. 둘째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국립고궁박물관의 ‘자수 송학도 병풍’이다. 준이종정도 병풍은 19세기 말에 궁중 장인이 만든 하사품이 전해지는 것이고, 반대로 송학도 병풍은 민간 장인이 만든 물건을 궁궐에 들여와 사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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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서 출발해 전통으로 돌아온
한편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에서 유학한 여성들은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미술 공예로서 신식 자수를 가르쳤다. 전시 포스터에 실린 작품인 김혜경(1928~2006)의 ‘정야’(1949)는 이 시기에 유행한 사실주의 회화 같은 자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겨울밤에 벽난로 불을 붙이고 앉아 책 읽을 준비를 마친 사람. 이제 막 가름끈을 끼워둔 책을 펼쳐 든 채 한 손으로 난롯불 온기를 확인하는 모습에는 한기가 가시면 곧바로 독서에 빠져들 준비를 마친 기대감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시에는 나혜석·천경자·박래현 등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여성 화가들의 회화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데, 이들도 같은 시기에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런 배경을 알고 보면 이 시기 자수과 출신 유학생들과 그 제자들이 자신들을 소위 ‘장이’(장인)가 아닌 예술가로서 인식하고, 자수 작업을 통해 여성의 사회참여와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던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작가들이 직업적 정체성을 고민하고 개척했던 흔적은 자수가 다양한 공예 분야 중에서도 ‘여성의 것’으로 여겨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상에 따라 급변해온 자수의 쓰임은 곧 시시각각 여성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던 근현대사와도 닮았다.
4부 ‘전통미의 현대화’는 전통 자수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이어지며 1980년대에 국가무형유산 제80호 자수장 지정으로 이어진 사례를 소개한다. 자수장으로 지정된 한상수와 최유현의 이력에는 한국 자수가 현대를 지나오며 거친 궤적이 그대로 비쳐난다. 이들은 어머니에게 자수를 처음 배운 뒤 유학파 스승을 사사해 전문가가 되었으며, 판매용 작품을 제작하고 전통 자수 복원과 전승을 위한 교육자로도 활동했다. 창작과 산업, 교육, 전통 등 전시에서 다룬 열망이 그들의 길에 오롯이 담겨 있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는 최유현이 10여년에 걸쳐 완성한 ‘팔상도’ 연작 여덟점이 걸렸다. 양산 통도사의 조선시대 불화를 옮겨 그린 뒤 그 위에 수를 놓은 것으로, 직접 염색한 수실과 다양한 자수 기법으로 입체감을 더해 표현했다. 미술관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화면의 묵직한 박력이 큰 전시를 돌아보느라 지친 관람객들의 발도 그 앞으로 붙들어 놓는다. 최유현 역시 젊은 시절에는 추상화를 밑그림으로 한 작업을 시도했고 그중 한 작품인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이 전시의 부제가 되었음을 떠올리며 ‘팔상도’를 바라보는 느낌은 각별하다. 문화유산을 이야기할 때 늘 ‘전통을 새롭게’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등장한다. 그러나 우선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옛것 가운데 전통으로 이을 것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갈 수 있는 것만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역설을 우리 자수의 여정을 통해 절감하게 된다.
이 전시 역시 전통에서 출발해 다시 전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긴 여행의 끝이 대개 그러하듯이, 돌아올 때는 빈손이 아니다. 한국 자수는 우리 역사와도 밀착된 수많은 맥락을 거느린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동시대인들의 앞으로.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유산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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