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형당한 저항세력, 개들이 시체 뜯어먹어…외적들에 수시로 점령당한 한양, 참혹했던 그때 [서울지리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와 제16대 인조(재위 1623~1649)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환란을 자초해 무능한 왕이라는 오명이 붙었다. 적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것도 공통점이다. 적치하의 서울은 약탈과 살육이 난무하는 지상지옥이었을까, 아니면 엄격한 신분질서에 짓눌려 살았던 조선 백성의 억눌린 욕구가 분출된 해방구였을까.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 일본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7년간 벌인 국제전이다. 조선은 전국토가 전쟁터로 변해 거의 모든 주거지가 파괴됐고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수도 서울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외교 교섭이 실패하자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1592년(선조 25) 3월 13일 수륙 침공군을 편성하고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육군은 9개 부대로 총병력이 15만 8700명, 수군은 9200명이었다. 4월 13일 오후 5시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700명을 태운 700여 척의 일본군 선박이 부산진 앞바다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의 서막이 올랐다.
서울·경기지역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7월 16일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우키다는 종묘에 거주했으나 밤만 되면 괴이한 일이 생기고 군사들이 급사하자 종묘를 방화하고 진을 남별궁(南別宮·소공동 조선호텔)으로 옮겼다. 예하 지휘관들도 화재를 면한 남촌에 자리잡았다. 소공주동(조선호텔 등 중구 소공동), 정사룡 가옥(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주변), 정릉동(정동), 서학동(西學洞·서울시의회 부근), 계림군 이유 가옥(덕수궁), 미장동(美墻洞·을지로입구 롯데호텔), 명례동(명동), 묵사동(묵정동), 호현동(회현동), 장흥고동(남대문1가·충무로1가) 등에 분산주둔했다.
대신 저항의 움직임은 철저히 탄압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로 모여 말을 하거나 거동이 수상한 자는 모두 불태워 죽여 동대문 밖에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했다. 참수가 아닌 화형을 선택한 것은 적대행위에 대한 엄벌 의지를 각인시키려는 조치였다. 의병활동이 본격화하자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경기감사 심대(1546~1592)가 도성 안팎의 군사를 규합해 서울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다가 삭녕(연천과 철원 일부)에서 일본군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일본군은 심대의 머리를 종루에 60일 동안 효수했다.
점령이 장기화되면서 부역자도 속출했다.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이효인이라는 부역자를 소개한다. <서정일기>는 고니시를 수행한 종군승려 텐케이(天期)가 기록한 일기다. 이효인은 술파는 상인으로 장사의 편의를 보장받으려고 텐케이에 접근했다. 은은 물론 융복(군복), 내외관안(內外官案·관직명, 품계, 관장사무를 수록한 책) 등 값진 선물을 수시로 바쳤고 일본군에 저항하려는 조선인 명단을 밀고했다. <서정일기> 6월 5~6일 기사는 “조선인 이효인이 반란자 9명의 이름을 적어 내게 보여주었다. 이를 군영을 지키는 자에게 고하니 그가 즉시 9명을 잡아 우키다 히데이에 공에게 보냈고, 공은 즉시 법을 집행하였다”고 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기간 무려 3번이나 서울을 비우고 달아났다. 처음은 1624년(인조 2) 1월 22일 평안병사 이괄(1587~1624)의 반란으로 인한 2월 8일부터 2월 22일까지 공주지역으로의 파천이다. 난민들에 의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됐지만 인명피해는 외침의 경우보다 비교적 경미한 편이었다. <인조실록> 1624년(인조 2) 2월 22일 기사는 “적이 패하여 성으로 들어간 뒤 도성 백성 80여 인을 죽였다. 또 적이 처음 와서 성안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에 들어간 자가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현저한 자를 여러 (관군) 장수들이 처치한 것이 200인이다”고 했다.
마지막 파천은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것이다. 그해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명과의 관계 단절, 군신의 맹약을 요구했다. 조선은 거부했다. 12월 2일 청 태종은 12만8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에 나섰다. 마푸타(馬夫大)가 이끄는 청군 선발대가 안주, 평양을 지나 이미 개성까지 도달한 사실을 접한 조정은 14일 강화도 파천을 결정했다. 이때는 이미 청군 일부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양천강(강서 가양동 공암나루)에 도달한 상태였다. 인조 일행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가 행렬이 구리개(을지로 1·2가 사이 고개)를 넘어 수구문을 나서자 울부짖는 도성민의 피난 행렬과 어지럽게 섞였다. 인조는 신천과 송파강을 건너 초경(저녁 8시 전후)이 지나서야 겨우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청군 선봉은 12월 27일 임진강을 건넜고 29일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 서쪽에 도착했다. 후발대도 쇄도했다. 인조가 떠난 서울은 곧바로 청군 선발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한 대로 백악산과 삼각산 일대로 숨어들었으며 유도대장 심기원도 27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 근교 산지에 잠복했다. 청군도 처음에는 약탈을 자제했다. 조경남(1570~1641)의 <속잡록>은 “적병이 모화관(서대문독립공원)에서 남관왕묘(남산 힐튼호텔)로 와서 주둔하였다. 5~6진영은 성 안에 머무르다가 동대문 밖에 나와 주둔하며 깃발과 칼을 휘두르고 군악으로 떠들어대 사람들을 놀라 당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중의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아니하고 출입 내왕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소, 말을 보면 빼앗고 어여쁜 여자는 잡아갔다”고 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굴복시키기 위해 인조의 가족이 피신한 강화도를 친다. 1637년(인조 15) 1월 21일 강화도는 도르곤(多爾袞)이 지휘하는 3만여명의 청군에 의해 단 하루만에 함락된다. 그리고 1월 30일 남염의(監染衣) 차림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면서 고통스러운 전쟁도 막을 내렸다.
우리는 불과 70여년 전에도 서울을 적에게 내준 바 있다. 이제 정말 똑같은 불행이 다시는 없어야겠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송와잡설(이기). 서정일기(西征日記·텐케이). 속잡록(조경남)
2. 조선시대 정치와 한양.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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