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이름의 가스라이팅…잘못된 관계 끊어낼 수 있을까

한겨레 2024. 6. 1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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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우리, 집
남자가 가정과 사회 대표하지만
엄마·아내가 아들·남편 조종 설정
가족이라는 ‘작품’ 만든 여성들
모순적 가부장제 떠받치는 구조
문화방송 제공

‘우리, 집’은 김희선의 매력과 이혜영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드라마다. 가정심리상담가와 추리소설 작가라는 캐릭터도 흥미롭다. 여기에 악역으로 등장한 연우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마침 역대 여성 범죄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그녀가 죽였다’가 화제인 가운데, 남자를 죽이고 보험금을 타내는 마녀 캐릭터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고부 관계의 두 여자가 의문의 사건에 맞서고, 거기에 빌런까지 여자라니, 여성 서사가 기대된다.

드라마는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한다. 불륜과 고부 관계가 주축인 가족 드라마라는 점은 익숙하다. 그러나 이들의 캐릭터와 관계성은 신선하다. 특히 두 사람이 심리와 추리를 활용해 공조하면서도, 끝까지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는 것은 흥미롭다.

제목이 중의적이다. ‘우리’와 ‘집’ 사이에 쉼표를 찍어, ‘우리’에 ‘짐승을 가둔 곳’(cage)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우리가 아는 집이 고상하고 안락한 인간의 쉼터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는 초반에 완벽해 보이는 노영원(김희선)의 가정을 보여준다. 그러곤 의문의 협박과 함께 가족들이 숨겨온 거짓말을 하나씩 알아가는 노영원의 심경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가정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다각도로 반문하며, 가부장제가 품고 있는 모순과 허구성을 무참하게 드러낸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

문화방송 제공

노영원은 ‘전 국민의 멘털을 책임지는’ 가정심리상담가이다. 티브이(TV)에 출연하는 명사이자, 상담 예약이 꽉 찬 전문의이다. 노영원은 일 못지않게 가정을 중시한다. 전 검찰총장 시아버지 최고면(권해효), 추리소설 작가 시어머니 홍사강(이혜영), 성형외과 의사 남편 최재진(김남희), 고등학생 아들 최도현(재찬)이 한집에 산다. 아내 노릇, 엄마 노릇은 물론이고, 며느리 노릇까지 완벽하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의문사한다. 유품을 정리하던 노영원은 비밀을 알게 된다. 과거 최고면은 친하게 지내던 노영원의 아버지를 횡령과 성추행으로 모함해 자살하게 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노영원은 아버지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고 “진실을 입증해 가족을 지키라”고 다그쳤다. 노영원은 과거의 행동이 너무 후회스럽고, 평생 인자한 시아버지인 양 행세했던 최고면에게 소름이 끼친다. 노영원은 시어머니에게 혹시 알고 있었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자 시어머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그게 뭐가 중요하니?”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시어머니의 반응도 의문투성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새겨들을 점도 있다. “지금까지 네가 이루어온 너의 커리어와 너의 가정을 깰 거야?” 노영원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커리어와 가정을 지키는 데 해가 될 뿐임을 인지하고 덮기로 한다.

문화방송 제공

그런데 끝이 아니다. 노영원에게 이상한 택배와 문자가 계속 전달된다. 학회를 간다던 남편이 1년 동안 거짓말을 해왔음을 알게 된다. 노영원은 남편의 행적을 쫓다가 맞닥뜨린 의문의 사건 현장에서 시어머니와 마주친다. 시어머니는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눈치다.

드라마는 노영원과 홍사강이 사라진 최재진을 찾아 통영으로 욕지도로 헤매는 과정을 로드무비처럼 보여준다. 최재진은 이세나(연우)와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고, 자살로 위장한 뒤 이세나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도피 중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세나의 존재를 시부모가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이 하나둘 밝혀질 때마다 노영원은 속에서 천불이 난다. 하지만 홍사강은 계속 아들만 싸고돈다. “바람이 뭐 대수니, 지금 사람이 죽었을 수 있는데”, “네가 너무 차가워서, 우리 재진이가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것”, “우리 재진이 진짜로 잘못되면, (네 명예에 손상 갈까 봐 신고 못 하게 한) 너 용서 못 해” 등등.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홍사강이 최고면의 외도로 일생 고통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역지사지가 전혀 안 되는 모양이다. 이것은 홍사강의 인격적 결함일까. 그보다는 가부장제의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는 구멍으로 봐야 한다.

“가족은 할머니·엄마의 작품”

문화방송 제공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키워드가 ‘가스라이팅’이다. 사실 제작 단계의 제목도 ‘가스라이팅’이었다. 노영원이 녹화하는 상담 프로그램 첫 장면에서 노영원이 ‘가스라이팅’을 설명한다. 노영원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서적 지배’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는 드라마의 주제를 암시하는 중요한 복선이다.

드라마에서 이세나가 남자들에게 해온 것도 가스라이팅이다. 홍사강은 최재진이 이세나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순진한 내 아들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실제로 최재진은 이세나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으며, 이세나의 변덕스러운 손끝에 목숨이 달려 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재진을 조종하는 것은 이세나만이 아니다. 극 초반에 아들 도현이 최재진에게 “아빠는 엄마에게 너무 조종당한다”고 말한다. 도현은 엄마가 아빠를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소이 누나(한성민)는 ‘엄마와 다른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현에게 “(머리) 커트할 때가 되었네”라고 말하는 소이를 보고, 최재진은 “비슷한데?” 하고 혼잣말을 한다. 요컨대 최재진이 노영원에게 조종되고, 이런 양상이 아들에게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 부자는 이런 사실을 서로에게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재진이 노영원에게 조종되는 양상은 최재진이 홍사강에게 조종되었던 질서에서 유래한다. 홍사강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가정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아들을, ‘더러운 아버지’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사강은 촉망받던 추리소설 작가 생활도 접고, 아들에게 집착하여 최재진을 홍사강이 원하는 대로 성형외과 의사로 만들었다. 도현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도현은 “할머니와 엄마의 작품”이라고 답한다. 요컨대 그들의 가정은 홍사강이 아들 최재진을 위해 만든 왕국이었다. 그 왕국에서 재진을 조종하고 보필할 권한의 일부를 며느리 노영원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홍사강이 아들 부부의 결혼 10주년 데이트 자리에도 ‘헬리콥터 맘’처럼 나타나서 와인을 건네는 모습을 보라. 아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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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사장되고 공격 시달리고

문화방송 제공

흔히 가부장제에서 가정의 주축은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내려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가정을 보라. 겉으로 봤을 때, 최고면은 존경받은 직업인이고 멀쩡한 가장이다. 그런데 검찰총장이었던 최고면은 사건을 조작하여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던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악인이다. 우면산 아래 저택을 소유한 부의 원천은 원래 처가 재산이었는데, 검찰총장을 하며 생긴 정·재계 인맥으로 재산을 불렸다. 홍사강에겐 대외적으로 검찰총장 남편이 필요했다. 최고면이 수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이혼하지 않은 이유이다. 홍사강은 최고면에게 아예 아들과의 접촉을 막았다. 그 결과 가정에서 최고면의 입지는 허울뿐이다. 의문사에도 부검이나 수사를 요구하는 유족이 없다.

최재진은 어떤가? 그는 홍사강의 바람대로,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지만, 피만 봐도 공황발작을 일으킨다. 그런 최재진 대신 부원장인 오 선생(신소율)이 대리수술을 한다. 오 선생은 홍사강이 오랫동안 후원했던 고아 출신의 여의사다. 홍사강은 대리수술을 세팅하고, 오 선생에게 보고받는 관계였다. 성형외과의 실질적인 경영 주체가 누구였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뿐인가. 홍사강은 재진의 외도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이세나를 찾아가 수표를 건넨다. 요컨대 최재진 역시 최고면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직업인이자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겉모습과는 딴판으로 살고 있었다. 노영원처럼 국민적 존경을 받는 의사는 고사하고, 불법 대리수술을 맡기고 이름뿐인 원장 노릇을 하는 일명 ‘바지’였다. 가정에서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이세나와 놀아나다, 오 선생과 엄마에게 들키자 급기야 도망쳐서 가족도 신분도 다 버리고 새로 살겠다는 헛꿈을 꾸고 있다. 최재진의 우둔한 삶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 홍사강, 노영원, 오 선생. 이들은 모두 재진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자들이다. 심지어 오 선생은 재진을 짝사랑하며, 노영원의 자리를 선망한다. 가만히 이 구조를 들여다보라.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가.

문화방송 제공

사회와 가정의 대표를 남자들이 맡고 있다. 이들이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남성들이 그 자리에 배치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며, 이들의 재능과 노동은 사장된다. 남자들은 사회인이자 가장으로 의심 없이 대우받지만, 여자들은 늘 선택과 공격에 시달린다. 홍사강처럼 커리어를 꺾고 아들에게 집중할 것인지, 커리어를 위해 가정을 포기할 것인지. 전자의 경우 ‘능력도 근성도 없는 여자들’ ‘맘충’이라는 비난이, 후자의 경우 ‘이기적인’ ‘독한’ 여자라는 비난이 뒤따른다. 노영원처럼 커리어와 가정 모두를 지키느라 죽을힘을 다한 여자조차 가정의 위기가 닥치면 비난받는다. “완벽을 추구하는 여자라서 숨이 막힌다”는 유책배우자의 무책임한 핑계가 그대로 인용된다.

노영원과 홍사강이 유일하게 공감하는 대목이 ‘아들의 엄마’라는 점이다. 둘은 각자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한다. 노영원은 어떤 엄마였을까. 최고의 가정심리상담가답게 아들에게 ‘네 선택’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도현이 느끼기에는 엄마의 지배력이 상당할 수 있다. 어쩌면 최재진이 홍사강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도현에게는 의문의 과외교사 문태오가 붙어 있어, 가스라이팅을 펼 것으로 보인다. 극 후반부에는 노영원과 도현의 갈등이 핵으로 부상하며, 모자 관계를 통해 고부 관계를 재조명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부디 노영원이 ‘아들의 엄마’라는 덫에 걸려 홍사강과 쉽게 연합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노영원이 가족이라도 잘못된 관계는 끊어내야 한다는 자신의 조언을 스스로 곱씹을 수 있게 되기를 응원한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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