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가 인정한 男, '인생역전 기회' 걷어찼다…이유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4. 6. 1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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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극I(내향형) 집돌이'
빌헬름 함메르쇠이(1864~1916)
자신의 공간에 가득 채운
위대한 내면의 힘
Interior with Young Woman Seen from the Back (1904). /랜더스 미술관

“당신의 작품은 훌륭합니다.”

그림을 들고 찾아온 젊은 화가에게 세계 미술시장의 거물, 뒤랑 뤼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인상파 화가들은 미쳤다”고 비웃을 때, 모네·마네·르누아르의 작품을 수천 점 사들여 결국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가 보기에 젊은 화가의 작품은 썩 괜찮았습니다. 뒤랑 뤼엘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다만 오늘은 시간이 좀 늦었으니 내일 아침 다시 와서 얘기하시지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젊은 화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

‘저 젊은 친구, 긴장을 많이 했나 보군. 나중에 거장이 된다면 오늘 일을 떠올리며 웃겠지.’ 뒤랑 뤼엘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돈과 영향력, 안목을 모두 지닌 그의 눈에 띄었으니 이제 그 젊은 화가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다음 날 젊은 화가는 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구먼.’ 이틀, 사흘이 흘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 사고라도 당한 건가?’ 그리고 또다시 일주일, 한 달이 흘렀습니다. 화가의 존재는 뒤랑 뤼엘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마침내 잊혔습니다.

하지만 만약 젊은 화가가 오지 않은 진짜 사연을 알았다면, 뒤랑 뤼엘은 죽을 때까지 그의 존재를 결코 잊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그 젊은 화가는 극도의 극도의 내향형 인간이자 집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던 ‘집돌이’. 뒤랑 뤼엘을 찾아온 건 “제발 집 밖으로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그림도 팔아 보라”는 엄마의 성화 때문이었고, 다시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귀찮고 부담스러워서’였다는 사실을요. MBTI로 따지면 ‘극 I’인 성격 탓에, 100여년이 지나서야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1864~1916)의 이야기.

 내향적인 천재

함메르쇠이의 캐릭터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똑같았습니다. 내향적인 성격의 천재. 그의 이런 성격과 재능은 불과 두 살 때부터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어린 시절 동화를 읽어주는데, 함메르쇠이가 연필을 집어 들더니 이야기에 나오는 괴물 그림을 그리는 거야. 두 살배기 치고 그림을 너무 잘 그리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얘가 울면서 뛰쳐나가는 거야. 자기가 그린 그림에 스스로 놀라서 도망간 거지. 어릴 때부터 어찌나 그림을 잘 그리고, 어찌나 내향적이었던지….”

Interior with an Easel, Bredgade 25 (1912)

어쨌거나 함메르쇠이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힘껏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프랑스에서 정통 미술을 배워온 과외 선생님을 붙여서 일종의 ‘영재 교육’을 시킨 거지요. 덕분에 함메르쇠이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15살 때 손쉽게 덴마크 최고의 미술 교육 기관인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함메르쇠이는 당시 덴마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였던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에르에게도 미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아침 8시 30분부터 4시까지는 크뢰이에르의 화실에서, 저녁을 먹은 뒤 7시 30분까지는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식이었습니다.

많은 ‘그림 영재’들 속에서도 함메르쇠이의 재능은 단연 빛났습니다. 그가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한 첫날에 대해, 훗날 코펜하겐 장식미술박물관장을 지내는 동기(에밀 하노버)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첫날부터 함메르쇠이는 비범했다. 함메르쇠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자마자 그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라는 걸 즉시 깨달았다. 그는 그 시절부터 이미 완성된 화가였다.” 크뢰이에르도 제자에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제자 중에, 정말 이상하게 그림을 그리는 애가 있어. 달빛 속 버터같이 희끄무레한 모습을 그리는 녀석이지. 실력도 좋으면서 왜 그렇게 그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 제자 녀석은 나중에 중요한 화가가 될 것 같아.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네.

등돌린 사람(1884). 이미 이때부터 함메르쇠이의 그림 실력과 독창적인 스타일은 거의 정립된 상황이었다. 함메르쇠이가 평생에 걸쳐 그리는 주제 중 하나인, ‘등 돌린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에, 관객들은 저마다 무의식적으로 인물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그의 그림이 더욱 신비로운 이유다./개인소장

이런 예측은 맞아떨어졌습니다. 20대에 접어든 함메르쇠이는 동생을 그린 데뷔작 ‘소녀의 초상’을 왕립아카데미 미술상에 출품해 덴마크 예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로요. 당시 덴마크 미술의 주류는 다채로운 색을 사용해 빛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자연주의’. 화려한 그림들만 계속 보던 심사위원들은 다른 그림들과 너무 다른 함메르쇠이의 작품을 “이상하고 칙칙하다”고 혹평했습니다.

Portrait of a young woman. The artist's sister Anna Hammershøi(1885). /The Hirschsprung Collection

하지만 젊은 작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진정한 예술을 알아보는 눈도 없는 쓸모없는 노친네들. 저런 심사위원들한테 심사받아봤자 무슨 쓸모가 있겠어? 우리가 따로 전시를 열자.”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새로운 전시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주류 미술계에 거부당한 인상주의자들이 따로 전시를 열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덴마크에서도 벌어진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함메르쇠이의 이름은 덴마크 미술계에 각인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별말 없었습니다. “나는 입상하든 말든 별로 상관 없는데….”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말 없는 미니멀리즘 부부

함메르쇠이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가 빨리는’ 성격이었습니다. 말년에는 자신이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개인적인 기록들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남이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싫어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증언이나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함메르쇠이의 이런 독특한 행동은 훗날 수많은 근거 없는 추측을 낳았습니다. 그가 색맹이었다거나, 한 쪽 귀가 안 들렸다거나, 신경쇠약증을 앓았다거나 하는 얘기들을요.

함메르쇠이와 아내의 이중 초상화(1892). /Davids Samling

다섯 살 연하의 아내 이다와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자세한 사연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26살 때(1890년) 한 이다와의 결혼이 함메르쇠이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함메르쇠이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뜨거운 사랑에 빠져 결혼을 강력히 추진했던 걸로 보입니다. 결혼 소식을 듣고 놀란 함메르쇠이의 형이 보낸 편지가 남아있거든요. “진심으로 축하해. 솔직히 네가 결혼한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함메르쇠이는 그 후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다를 사랑했고, 항상 그녀를 그림의 모델로 썼습니다.

둘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편지들에 따르면 이다도 함메르쇠이만큼이나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 없는 부부는 어딜 가나 붙어 다녔습니다. 함메르쇠이가 그림 연구를 위해 파리, 런던, 로마 등 해외를 돌아다닐 때도요.

19세기 덴마크의 일반적인 실내 인테리어.

취향도 같았습니다. 인테리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코펜하겐의 평균적인 인테리어는 아주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미니멀리즘 성향이 강했습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던 함메르쇠이는 한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흥분한 적이 있습니다.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였지요. “도대체 왜 온 세상천지에 무의미하고 터무니없이 못생긴 장식들이 달려 있는 거죠? 일부러 고생해서 아름다움을 없애고 집을 훼손하는 꼴입니다. 건축업자들은 반성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코펜하겐의 구도심 스트랜드가데 거리의 30번 주택은 이들의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었습니다. 깔끔한 벽면, 과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한 몰딩, 고전적이고 절제미와 균형이 있는 인테리어…. 그래서 함메르쇠이의 ‘집안 그림’은 이곳에서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Interior, No 30 Strandgade(1906). /Aros Aarhus Kunstmuseum

 지독한 집돌이, 집으로 빛을 그리다

함메르쇠이의 성격과 작품은 여러모로 일반적인 화가의 이미지와 다릅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화가의 표본이 모네, 르누아르, 고흐 같은 인상주의 화가라서 그렇습니다.

Open Doors Strandgate 30(1905). 평범한 문도 눈여겨보면 독특한 특징이 보인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공간의 공허함이 강조된다. /David Collection


The Coin Collector Strandgade 30(1904). 닫혀있는 문에서 쓸쓸함과 답답함이 느껴진다. /개인소장

인상주의자들은 밖에 나가 밝은 물감으로 세상의 빛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함메르쇠이는 집 밖이 싫었습니다. 집을 너무 좋아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어찌나 집에 오래 있었으면, 집이 가진 여러 면모를 사람의 얼굴 특징처럼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닫힌 문’까지도 그림의 주제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열려있는 문’도 그에게는 저 너머 방의 황량한 모습을 강조시킬 수 있는 훌륭한 장치였습니다. 

인상주의자와 함메르쇠이는 쓰는 물감 색도 정 반대였습니다. 다양한 색의 물감으로 화려한 인상주의자의 팔레트와는 달리 함메르쇠이의 팔레트는 어두침침했습니다. 한 동료 화가(요아킴 스코브가드)는 그의 팔레트를 보고 깜짝 놀라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절대 잊지 못할 팔레트였다. 서로 꼼꼼하게 구분된 네 개의 회색과 흰색의 색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색이 층층이 쌓여 있어서 굴 껍데기들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색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덴마크 왕립아카데미에 남아있는 하메르쇠이의 팔레트.

수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습니다. 1907년 함메르쇠이에게 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왜 그렇게 차분한 색만 사용하나요?” 함메르쇠이의 답은 이랬습니다. “솔직히 몰라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나한텐 이게 자연스러워요.” 하나 마나 한 답변을 들은 기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져서였을까요. 함메르쇠이는 한마디 덧붙여 줬습니다. “나는 색을 적게 사용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함메르쇠이는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고요하고 조화로운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건축물을 즐겨 그렸고, 인상주의를 비롯한 같은 시대 미술보다는 이집트 미술이나 그리스 미술을 좋아했다는 게 단적인 예입니다. 특히 좋아했던 건 네덜란드의 미술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페르메이르)였습니다.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1660년경). 함메르쇠이는 페르메이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등장인물의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인물들이 여러 복잡하고 신비한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함메르쇠이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일종의 소품이다. 등장인물보다 주인공에 더 가까운 건 집 그 자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하지만 인상주의자들과 함메르쇠이에게는 중요한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빛’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는 겁니다. 인상주의자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화려한 빛을 그렸다면 함메르쇠이는 어두운 방에 떨어지는 햇살 속 먼지 알갱이가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인상주의자가 넓은 창 밖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그렸다면, 함메르쇠이는 빛을 집안 깊숙이 받아들이는 통로로서의 창을 그렸습니다.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끌’은 이를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힙니다. 덴마크의 미술사가이자 최고의 함메르쇠이 전문가인 폴 바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빛은 한 지점에 묶여 있습니다.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요.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그림으로 남기는 걸 추구했다는 점에서, 함메르쇠이와 인상주의 사이에는 일종의 깊은 공감대가 있습니다.

Dust Motes Dancing in Sunbeams(1900). /Ordrupgaard Copenhagen Denmark

 고요함으로 충만한 내면

시간이 흐르면서 함메르쇠이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대표적입니다. 함메르쇠이의 작품에 푹 빠진 릴케는 직접 작가를 찾아가 만남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제대로 의사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언어의 장벽도 문제였지만 함메르쇠이에게 대화를 나누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이유가 더 컸습니다. 잘만 하면 자신을 널리 알릴 기회였지만, 함메르쇠이는 원래부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릴케는 그런 함메르쇠이의 기질을 알아봤습니다. 훗날 릴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그림만 그릴 뿐, 다른 일은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사람 같았다. 괜찮다. 그는 서둘러 이야기해야 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감상해야 할 만큼 맛이 깊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함메르쇠이의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러면 예술에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Five portraits(1901~1902). /Thiel Gallery

가족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함메르쇠이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함메르쇠이가 스물네 살이던 1888년부터 평생 작품을 사 주고, 그의 작품을 미술계에 홍보하고, 귀중한 기록들을 남긴 헌신적인 컬렉터 알프레드 브람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함메르쇠이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거리감은 어찌 할 수 없었나 봅니다. 미술사가 폴 바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함메르쇠이가 그린 브람센의 초상화를 보면, 여전히 둘 사이의 마음의 벽이 느껴진다. 인물의 특성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한 평작이라 볼 수 있다. 브람센은 그의 영혼을 가질 수 없었다.”

친구들을 그린 ‘다섯 명의 초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속 친구들의 모습은 위엄 있게 묘사됐지만 어딘가 무섭고 위압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몇 안되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함메르쇠이는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Interiør Musikværelset, Strandgade 30(1907). /개인소장

이렇듯 누가 뭐라 해도 함메르쇠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도 그의 고요한 내면을 어지럽힐 수 없었습니다. 구부정한 자세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느라 신경통이 생겨도, 그림값이 올라도, 해외 전시가 대성공을 거둬도, 그는 묵묵히 그림 그렸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아내와 보내는 평온한 일상뿐이었습니다. 그러다 52살이던 191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지켰습니다. 함메르쇠이다운 최후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후 함메르쇠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세계 미술계에서 잊혔습니다. 함메르쇠이의 작품이 가장 인기 있던 곳은 독일이었는데,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 미술계가 초토화됐기 때문이었습니다.

Stue i Strandgade med solskin på gulvet(1901). /Statens Museum for Kunst

다시 그의 이름이 부활한 건 1980년대. 미국 등지에서 함메르쇠이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기 시작하면서입니다.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표현으로 그려낸 텅 빈 실내 공간과 여인의 뒷모습은, 에드워드 호퍼·르네 마그리트·앤드루 와이어스 등 비슷한 느낌의 대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현대적인 미학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기는 입소문을 타고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특히 지난 10여년간 그의 작품은 영미권의 집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2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인수했고, 시카고미술관과 게티 등 다른 주요 기관도 잇따라 함메르쇠이의 작품을 사들였고요. 올해 들어서도 세계적인 경매사 필립스가 뉴욕에서, 유력 화랑 하우저앤워스가 스위스 바젤 지점 개관전으로 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미술 전문 매체 아트넷이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까지 북미 주요 미술관들의 주목을 받은 예술가는 없었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어찌 보면 함메르쇠이의 작품은 심심하고, 칙칙합니다. 재미있는 얘깃거리도, 극적인 스토리도 없이 집에 틀어박혀 묵묵히 그림만 그렸던 자신의 삶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는 이유는, 갈수록 번잡해져 가는 세상의 모습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함메르쇠이는 평생토록 자신만의 템포로 말하고 걷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켜낸 독특한 화가.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독보적인 수준의 고요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Moonlight, Strandgade 30(1900~190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V도, 스마트폰도, 할 일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집 안에 홀로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집으로 들어온 한 줄기 햇빛, 혹은 달빛은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을 비추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문과 문손잡이, 방바닥과 같은 나를 둘러싼 사소한 것들의 존재가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이리저리 떠다니며 비로소 힘을 빼고 쉴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지만 그렇기에 고요함으로 충만한 휴식의 시간. 우리에게는 때로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함메르쇠이의 작품에는 그런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함메르쇠이의 작품과 함께, 주말을 맞아 평안한 재충전의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이때까지 함메르쇠이에 관해 출간된 책 중 가장 충실한 연구서인 Vilhelm Hammershoi: and Danish Art at the Turn of the Century (Poul Vad 지음)을 중심으로 Vilhelm Hammershoi(Henrik Wivel 지음), 하우저앤워스 바젤 지점의 Press Relaease 자료, Pov. International의 기사 ‘Stovkornenes dans i solstralerne: Vilhelm Hammershoi og det moderne gennembrud’(Freddy Hagen 작성)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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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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