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스만이 실종시킨 ‘내부 경쟁’ 돌아오자 태극전사들이 살아났다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A대표팀)이 불안과 우려의 시선을 넘어섰다. 정식 감독 선임에 차질을 빚고 있는 대한축구협회는 3월에 이어 6월도 임시 감독 체제로 월드컵 2차 예선을 치렀다. 6월 임시 사령탑에 오른 김도훈 감독은 짧은 시간에도 명확한 콘셉트를 꾸렸고, 손흥민과 이강인 등에게 양질의 전술 역할을 부여했다. 결과는 싱가포르 원정에서 7대0 대승, 홈에서는 중국에 1대0 승. 오는 9월부터 시작되는 월드컵 3차 예선 톱시드 확보라는 미션까지 완수했다.
6월 김도훈호를 더 깊게 관찰하면 의미 있는 성과가 눈에 띈다. 클린스만호 시절 A대표팀에서 사라진 내부 경쟁 분위기가 살아났다는 점이다. 클린스만 감독 시절에는 설영우, 박용우 정도를 제외하면 벤투 감독 시절의 주전 멤버 그대로 갔고, 그의 1년여 부임 기간 동안 경쟁은 무의미했다. 베스트11 예상이 너무나 쉬웠다. 결국 아시안컵에 들어서 플랜A가 삐걱거리자 순발력 있게 대응책을 내지 못했다. 스리백 전환 같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부화뇌동하다 침몰하고 말았다. 오히려 임시 감독을 맡은 국내 감독들은 지금 A대표팀에 필요한 자극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황선홍 감독에 이어 김도훈 감독도 국내외에서 좋은 실적을 쌓은 새 얼굴들을 과감히 발탁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분위기를 일신하는 활력소가 됐다.
'제2의 이강인' 배준호의 등장…2선 강화
6월에 소집된 새 얼굴 중 가장 화제를 모은 선수는 2003년생 배준호였다. 고교 시절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받으며 2022년 대전 하나시티즌에 입단한 그는 1년6개월 만에 이적료 30억원을 기록하며 유럽 무대로 진출했다. 배준호는 새 소속팀인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의 스토크시티에서도 적응 기간 없이 바로 에이스로 활약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유럽 1부 리그 주요 팀들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정교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공격 2선의 중앙과 좌우 측면을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배준호는 이강인과 장점이 닮았다. 4년 간격으로 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인정받았다는 점도 같다. 배준호는 2023년 U-20 월드컵대회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을 견인했다. 이강인이 세계적 수준의 왼발을 이용한 득점·도움 능력이 탁월하고 배준호는 양발을 이용한 부드러운 플레이와 침투 플레이가 좋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2023~24 시즌 배준호의 눈부신 활약상을 주목한 김도훈 감독은 A대표팀 발탁과 데뷔 기회를 선사했다. 싱가포르 원정에서 후반 25분 이재성을 대신해 투입된 배준호는 9분 후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침착하게 마무리, A매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득점 외에도 좋은 개인 기술로 상대를 공략, 1년간 유럽에서 일군 성과의 의미를 증명했다.
2선의 멀티 자원인 배준호까지 성공적으로 A대표팀에 안착하면서 기존의 손흥민, 이재성, 이강인, 황희찬, 황인범 등이 펼치던 주전 경쟁은 한층 뜨거워졌다. 싱가포르전의 경우 프리미어리그에서 시즌 12골을 기록한 황희찬이 벤치에서 출발해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유럽과 남미의 웬만한 대표팀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한국의 화려한 2선에 배준호가 추가된 것이다.
배준호의 등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유럽에 진출하는 선수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가운데, 배준호처럼 경쟁력을 증명한다면 A대표팀 발탁 기회도 빠르게 잡을 수 있다. 올 시즌 K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강원FC도 2006년생인 고교생 양민혁이 공격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다. 양민혁은 이미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유럽 스카우트들이 직접 관찰하기 위해 강원 홈경기를 찾을 정도다. 이렇게 K리그에서 빠르게 증명하고, 유럽으로 가서 경쟁하고, A대표팀에 진입하는 루트는 확고해졌다.
주민규의 재발견…전방에도 긴장감 살아나
배준호와 결이 다른 등장도 있다. 1990년생 스트라이커 주민규다. 만 34세인 주민규는 지난 3월 황선홍 감독의 부름을 받고 처음 A대표팀에 뽑혔다. 2021년과 2023년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물오른 골 감각을 지녔지만 황의조, 조규성, 오현규 등에 밀려 A대표팀 승선의 꿈이 번번이 좌절됐다. 하지만 주민규는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기회를 기다렸고, 복잡한 상황이 얽히며 그의 꿈은 현실이 됐다. 황의조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대표팀에서 제외되고, 오현규가 소속팀인 셀틱에서 출전에 애를 먹으며 대표팀 최전방에 조규성만 남게 된 것.
새로운 스트라이커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선수 시절 특급 골잡이였던 황선홍·김도훈 두 감독 모두 주민규의 능력을 인정하고 A대표팀으로 불렀다. 3월에 처음 A대표팀에 와 나름의 경쟁력을 보여준 주민규는 조규성이 무릎 부상으로 소집되지 않은 6월에는 최전방의 우선 옵션이 됐다. 싱가포르전에 선발 출전한 그는 특유의 빠른 연계와 문전 마무리로 1골 3도움을 기록했다. 특히 손흥민과의 뛰어난 호흡 때문에 토트넘 시절 해리 케인을 연상케 한다는 반응이 많았다.
중국전에서도 손흥민의 돌파 외에는 답답했던 공격이 후반 15분 주민규의 투입과 함께 살아났다. 한국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상대 수비를 끌고 다니는 주민규 효과를 곧바로 봤다. 투입 1분 만에 문전 혼전 상황에서 흐른 공을 이강인이 결승골로 연결한 것. 주민규에게 중국 수비진이 쏠리며 생긴 공간을 이강인이 놓치지 않고 침투해 왼발로 마무리했다. 한국 축구 역대 두 번째로 많은 나이에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한 주민규는 국가대표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주민규 외에도 박승욱, 하창래, 황인재 등 최근 수년간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친 선수들도 6월에 소집됐다. 박승욱은 오른쪽 측면 수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A대표팀 선수층이 두터울수록 경쟁력은 높아지는데 한국 축구가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두고 다시 그 흐름을 탄 것이다. 다만 과제도 남았다. 1년3개월 만에 A대표팀에 돌아온 1989년생 정우영이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구관이 명관임을 확인했지만, 북중미월드컵 이후를 본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의 새 얼굴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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