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듣고 싶을 때, 한적해서 머물기 좋은 고성[ESC]

한겨레 2024. 6. 1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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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강원도 고성
동해에서 가장 푸른 화진포 해변
최북단 중국집 ‘중화비빔밥’ 별미
‘관동별곡’ 등장하는 정자 ‘청간정’
아야진 해변은 수심 얕고 잔잔해
동해에서 가장 푸른 물빛을 띠는 강원도 고성 화진포 해변을 찾은 여행객들.

“자고로 인생에는 자기가 원하는 날 쉴 수 있는 휴일이 필요한 법이야.”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마스다 미리의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에서 이 구절을 읽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인생의 자부심을 느낄 때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때고, 쉬고 싶을 때 쉴 때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인생을 더 다정하게 만들어주는 건 사랑이 아니라 탄수화물과 휴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지난 2주 동안 정신없이 보냈다. 단백질 바와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일했다. 마감과 프레젠테이션과 출장이 100만 대군처럼 성난 기세로 몰려들었다. 인쇄소에 곧 출간할 신간 데이터를 넘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귓전에는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어디로든 가자. 그 어디가 바닷가라면 더 좋을 것이고.

‘가을동화’ 준서가 은서 업고 걷던 곳

여기는 강원도 고성 화진포 해변이다. 곧 7월이 되면 바다는 피서객들로 붐빌 테니까 제대로 된 바다를 볼 수 있을 때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왔다. 젊었을 땐 사람으로 북적이는 곳이 좋았지만 이젠 한적한 곳이 좋다. 고성으로 온 것도 강릉이나 양양, 속초의 해변에 비해 여유롭기 때문이다. 오는 데 3시간 넘게 걸렸지만 길이 좋아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양양까지 고속도로를 쭉 타고 와서 7번 국도를 따라 냅다 위쪽으로 달리면 되니까. 옛날, 그러니까 20여년 전에는 인제를 지나 진부령을 넘어야 했다. 진부령 넘기 전 황태해장국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강원도에 가려면 미시령-진부령-한계령-대관령-구룡령을 넘어야 했던 시절이다. 눈이 내리면 통제되기가 일쑤였다. 다 옛날이야기다.

화진포 해변은 흰 백사장과 푸른 파도만으로 이루어진 ‘심플한’ 해변이다. 동해안에서 가장 푸른 물빛을 가지고 있는 곳, 바다의 뒤채임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변에 들어서면 꽉 막힌 가슴이 환히 뚫린다. 풍경은 마음을 다독여준다. 누군가와 싸웠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마뜩잖은 인생사가 마냥 답답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울화가 솟구칠 때, 사는 일이 심드렁해졌을 때, 우리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이유는 풍경이 마음을 쓰다듬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바다에 오면 날개를 펄럭이며 반공(땅에서 그리 높지 않은 허공)을 나는 갈매기가 “인생,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하고 속삭여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옛날에 ‘가을동화’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송승헌과 송혜교가 주연이었다. 화진포 해변은 이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준서(송승헌)가 싸늘히 식어가는 은서(송혜교)를 업고 하염없이 걸었던 곳으로 나왔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듣는 파도 소리가 좋다. 화진포 해변의 모래는 조개껍데기와 바위가 부서져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파도가 지날 때마다 차르륵차르륵 하는 소리를 낸다. 조선시대 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화진포 백사장을 ‘울 명(鳴)’ 자와 ‘모래 사(沙)’ 자를 써 ‘명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화진포 해변 건너편은 화진포호다. 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은 곳에 생긴 석호(모래사장이 발달해 바다와 격리된 호수)다. 화진포(花津浦)라는 이름은 여름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서 붙은 이름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석호라고 한다. 아직 해당화는 피지 않았다. 예전에는 없던 조류 관찰대와 탐방로가 생겨 따라 걸어 보았다. 관찰대에서는 넓은 습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화진포는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혼자서 짜장면에 중화비빔밥까지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의 화진포 호수.

화진포에는 이승만과 김일성의 별장이 있다. 그만큼 경치가 좋았다는 뜻이겠지. 화진포 해변에는 ‘화진포의 성’이라고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있다. 1938년 독일 건축가가 예배당으로 지었는데, 1945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외국인 휴양촌 귀빈관으로 사용됐다.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김정일 등 자녀를 데리고 와서 귀빈관에 자주 머물곤 했다고 한다. 화진포 호수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다. 단층 슬라브 형태인데, 1954~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한 별장으로, 지금은 이승만대통령화진포기념관으로 활용된다. 실내에는 침실과 집무실, 거실이 옛 모습대로 복원돼 있고 벽과 유리장에는 학위증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 별장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오른쪽)과 프란체스카 여사 밀랍인형.

이승만 별장을 내려오며 문득 궁금했다. 살면서 가고 싶을 때 언제든 훌쩍 갈 수 있는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호텔 예약을 하기 위해 아고다나 호텔스닷컴을 번갈아 들어가며 최저가를 비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인생은 분명 편하겠지. 별장에 도착하면 자기가 쓰던 침대와 책상, 소파가 놓여 있는 인생은 분명 안온할 거야. 안 풀리는 글이 있거나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별장으로 후다닥 뛰어가면 되는 인생은 생각만 해도 멋지다. 스타벅스를 전전하며 마감하는 가난뱅이 작가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아 몰라, 어쨌든 여행을 떠나왔으니 신세 한탄 같은 건 하지 말고 뭔가 맛있는 걸 먹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든다. 메뉴는 짜장면이다. 고성까지 와서 웬 짜장면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고 싶어 떠나온 여행이니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다고 잘못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난 중국집을 좋아한다. 전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면 꼭 가보려고 한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지역의 향토 음식을 먹어야지! 예전엔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여행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활과 구분되는 것이 아닐까. 좋은 기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다. 비록 별장은 가지지 못한 인생이지만 여행 정도는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

‘동해반점’의 중화비빔밥.

동해반점은 우리나라 최북단 중국집이다. 화진포에서 5분이면 닿는다. 초도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다. 오픈 시간에 맞춰 왔기 때문인지 아직 한적하다. 가게에 앉으면 푸른 바다가 바라보인다. 파도 소리가 밀려드는 중국집이라니.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중화비빔밥이다. 밥에 해산물과 매콤한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다. 짜장면을 먹을까, 중화비빔밥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둘 다 주문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가장 불편한 점은 다양한 메뉴를 맛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럴 땐 두 가지 메뉴를 시킨다. 별장은 가지지 못한 인생이지만, 짜장면과 짬뽕 정도는 시킬 수 있다. 여행이란 고민 없이 먹고,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고, 만족하며 돌아가면 성공한 것이다. 음식을 먹는 사이, 포장해 가는 군인들과 현지인이 가끔 온다. 경험상 동네 사람이 포장하러 오는 곳은 틀림없이 훌륭한 가게다. 달콤한 짜장면 한 젓가락, 매콤한 비빔밥 한 숟가락을 번갈아 먹으며 자잘한 고민 따위는 수평선 너머로 떠나보낸다. 짜장면 반 그릇과 중화비빔밥 반 그릇을 먹고 나와 소화도 시킬 겸 잠시 해변을 걷는데, 그 사이 차들이 몰려왔다. 중국집은 금세 바빠지고 주방이 소란스러워진다. 기름 볶는 냄새가 해변으로 흘러나온다. 음식점이든, 피서지든 조금 일찍 도착한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며 해변을 꾹꾹 눌러 밟으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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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 명소’ 송지호해수욕장

드넓은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청간정.

자,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 아야진 해변과 청간정을 볼 것인가, 아니면 북쪽으로 통일전망대를 가볼까.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 그게 훌쩍 떠나온 혼자 여행만의 묘미다. 어디를 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의논할 필요도, 양보할 필요도 없다.

남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창문을 열고 국도를 따라 달리고 있다. 머리를 식히려고 떠나온 여행이다. 철조망 너머로 북녘땅을 바라보는 일은 이번 여행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망원경으로 북녘땅을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는 것도 좋지만, 새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한 호수를 따라 걷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는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화진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송지호다. 둘레 6㎞로 그다지 큰 편은 아니지만, 그 풍경은 어느 호수 보다 아름답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뒷짐을 지고 걷는다. 호수 는 거울처럼 잔잔하고, 자작나무 숲에서 날아온 새 소리가 발치에 내려앉는다. 호수 건너편은 송지호해수욕장인데, 최근에는 서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서핑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배워보고 싶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화진포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송지호 탐방로.

송지호에서 더 내려오면 청간정이다.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은 동해안을 둘러보고 ‘관동별곡’을 지었는데, 관동에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청간정을 꼽았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팔작지붕 중층 누각이 나오는데, 누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인 동해가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기분 좋은 솔향이 실려 온다.

바다가 더 보고 싶어 아야진 해변으로 왔다. 바다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활처럼 부드럽게 휜 백사장 북쪽에 갯바위 지대가 펼쳐진다. 모래사장이 깔린 부분은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도 얕다. 갯바위 지대에서는 게와 조그만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신발을 벗어 손에 쥐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걸어간다. 차르륵 차르륵, 발 앞으로 잔잔하게 파도가 밀려든다. 날 섰던 마음은 시원하게 그어진 수평선 앞에서 어느새 너그러워졌다. 사람은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그 책만큼 지혜로워지고, 여행을 한 번 떠날 때마다 그 여행의 길이만큼 너그러워진다.

아야진 해변의 갯바위.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다정하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마스다 미리의 말만큼이나 맞는 말이다. 터프한 세상 속, 우리는 다정해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 다정해지기 위한 그 노력이 아마도 여행이지 않을까.

돌아오는 길에 들른 건봉사 불이문.

오늘은 아야진 해변에서 자고, 내일 돌아가는 길에는 건봉사에 들러야겠다. 건봉사 가는 숲길은 짙은 초록으로 눈부시겠지. 절집 마당에 떨어지는 풍경 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은 조금 더 다정해질 것이다. 장미경양식에 들러 소스가 잔뜩 뿌려진 옛날 돈가스를 먹는 것도 좋겠다. 커다란 돈가스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먹다 보면 별장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강원도 고성 가볼 만한 곳

그곳에 가면 대한민국 3대 막국수가 있다

‘백촌막국수’의 막국수.

고성에 갔다면 토성면에 자리한 백촌막국수(033-632-5422)의 막국수를 맛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대한민국 3대 막국숫집 가운데 한 곳으로 불리는 곳이다. 막국수와 함께 얼음을 동동 띄운 동치미가 나오는데, 이 동치미를 붓고 참기름과 설탕을 첨가해 손님이 취향껏 만들어 먹는다. 톡 쏘면서 시원한 동치미를 한 숟가락 먹어보면 식도락가들이 왜 열광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반찬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게 빨간색의 무침이다. 얼핏 보면 무말랭이를 무쳐 놓은 듯하지만 실은 명태식해다.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입에 붙는다.

‘장미경양식’의 돈가스.

거진읍에 있는 장미경양식(033-682-2084)은 40년 넘은 돈가스집이다. 추억의 옛날 돈가스를 맛볼 수 있다.

카페 ‘do it 192’.

do it 192’(0507-1389-8712)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풍경.

통일전망대에서는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다. 금강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에메랄드빛 동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전망대 가기 전 출입신고소를 통해 신고서를 작성하고 교육을 받고 들어가야 한다.

디엠제트(DMZ)박물관 내부 모습.

통일전망대에서 디엠제트(DMZ)박물관이 가깝다. 전쟁·군사 자료와 유물을 비롯해 자연·생태·민속·예술 등 한국전쟁과 디엠제트에 관한 전시물이 있다. 통일전망대 가기 전, 대진항에 잠깐 들러 기념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좋다. 우리나라 최북단 항구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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