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탐·인]한국화가 허진 교수 "작은 것도 큰 것이, 큰 것도 작은 것이 될 수 있다"(1편)
다음 달 7일까지 출판 기념 초대전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 갤러리 '이레'
인간·자연·문명의 관계성 성찰 보여줘
[예·탐·인]한국화가 허진 교수 "작은 것도 큰 것이, 큰 것도 작은 것이 될 수 있다"(1편)
◇ 장자의 '가을 짐승의 털끝' 인용 표현
한국화가 허진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문명의 관계성을 회화 속에서 직조하며 성찰하는 초대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허 교수는 지난 8일부터 35번째 개인전을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마을의 갤러리 '이레'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시회는 다음 달 7일까지입니다.
특히 허 교수는 이번 전시회와 맞물려 '화가 허진'의 작품 세계와 여러 스타일의 글쓰기를 연계한 매거진형 아트북 'HURZINE'을 발간해 색다른 시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허 교수의 이번 전시의 주제는 '가을 짐승의 털끝'으로, 이 말은 '장자-제물편'에서 따왔습니다.
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아주 작은 것'을 뜻하는 '추호지말(秋毫之末)'을 인용해 작업한 작품들입니다.
◇ 장자 '추호지말(秋毫之末)' 인용
- 이번 전시에 대해.
"장자는 '가을 짐승의 털끝'을 예로 들어 비교 대상에 따라 작은 것도 큰 것이 될 수 있고 큰 것도 작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설파하며 만물을 관계 속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작은 것도 큰 것이 될 수 있고 큰 것도 작은 것이 될 수 있는' 관계성에 입각해 차려졌습니다."
- 어떻게 구현했는지.
"작품 속에는 야생동물과 인공물이 사람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사람은 일상생활을 묵묵히 수행하는 집단 속의 개체처럼 그렸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동물의 원시성과도 대립되고 인공물의 무생물성과도 비껴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 미학적인 목표가 따로 있는지.
"자연과 문명의 길항 또는 미끄러짐 속에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도상들의 크기와 각도를 자유자재로 제어하고 도상들 간의 인접과 충돌을 표현함으로써 인간, 자연, 문명의 관계를 성찰적으로 직조하고 있습니다."
- 전시 주제에 대해 설명해달라.
"세밀하게 묘사한 야생 동물들의 털이 예리함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단지 짐승의 털을 묘사하기 위해 이 그림들을 그린 것이 아니죠. 육중한 야생동물과 인간의 일상용품 사이에 현대인의 모습을 검은 실루엣으로 배치해 거친 자연과 매끄러운 문명 사이에서 부딪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반추합니다."
- '유목동물'과 '이종융합동물' 시리즈의 관계성은에 대해 설명해달라.
"'가을 짐승의 털끝'이라는 제목은 '장자'에서 따왔습니다. '장자-제물편'에 나오는 '추호지말秋毫之末'이 그것이지요.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말합니다. '가을철에 짐승이 털갈이를 해서 새로 돋은 털끝보다 큰 것은 천하에 없다.' 가늘디가는 가을 짐승의 털끝도 비교 대상이 뭐냐에 따라 클 수 있다는 말이지요. 저는 제 그림 속에 표현된 인간, 동물, 문명의 관계를 성찰적으로 바라보자는 뜻으로 이 제목을 썼습니다."
- 인간과 동물, 또 인공사물의 관계를 보는 관점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서 유래했지만 문명을 발달시키고 동물의 제왕인 듯이 군림하면서 자연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동물은 인간의 타자(他者)인 동시에 인류의 원시성을 담은 존재죠. 저는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중의 숙명 속에 놓인 인간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동물과 인공물을 함께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 우연적·충동적 이미지의 수용으로 보면 되는지.
"제 첫 발표작 '묵시' 시리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는 우연적인 이미지, 제 머릿속으로 들어온 충동적인 이미지를 수용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작품 해석에 애매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이런 면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는 저 자신에게도 숙제이자 궁금한 부분입니다."
- '동물' 시리즈에 '바닥'이 없다.
"다중시점으로 가상현실 공간에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산수화의 화중인물처럼 보는 사람이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하는 게 제 희망이지요."
-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는지.
"20대 중반에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인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작품을 보고 충격 받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작가의 브랜드는 거꾸로 선 인간의 형상이에요. 맨 처음엔 어설프게 느껴졌는데 여러 번 보니 힘이 있더군요. 바젤리츠를 통해서 화면에 자유자재로 대상들을 종횡무진 배치하고 싶다는 계기를 제공받은 거 같아요."
- '현대산수도'에 동물 형상, 인체 장기의 형상을 배치한 이유가 있다면.
"그 작업은 1999년 금호미술관에서 선을 보였습니다. 큰 화면을 차지한 자연 이미지는 인간이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을 낙원으로 상정해 그렸어요. 요즘 '풍멍'이라는 말이 있는데, 풍경 보며 멍 때릴 수 있는 곳, 치유하는 곳이지요. 작은 화면들은 제 일상생활에서 느낀 것들을 일기처럼 기록하는 기분으로 그렸어요."
- 계기가 있는지.
"그 무렵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자주 갔는데 그런 경험도 반영돼 있지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한순간 부서질 수 있는 매우 연약한 물질이기도 합니다. 인체, 동물의 몸, 그리고 사물들에는 서늘한 품격이 있어요. 그 서늘함은 유한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제 생각을 자극한 것들을 강렬한 컬러로 표현했어요. 저는 늘 다층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된 풍경 화면과 작은 화면들이 모여 기이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가 연출되길 바랐습니다."
- 작품 세계의 방향성에 대해.
"제 작품세계를 일관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입니다. '묵시', '환', '부적'에서 과거 시간이 현재에도 지속됨을 보여주었다면, '다중인간'을 하면서 인간의 몸과 감각에 집중하고,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더라고요."
- 자연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인지.
"광주에서 살면서 주말만 되면 가족들과 함께 전국의 좋은 산천을 찾아 여행했던 7년간 경험에서 자연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지요. '익명인간' 작업을 하면서는 주도권을 자연풍경에 넘기고 싶어졌습니다."
- 종교나 철학적 개념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지.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이라는 말을 씁니다. 모든 것은 다 연으로 이어지고 우주는 그 일체라고 하지요. 저는 가끔 내면세계로 침잠해 우주의 파동을 느낍니다. 그러면 내가 곧 동물이며 또한 사물이며 심지어 남도 나입니다. 제가 계속 작업하는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 시리즈 근저에는 하늘, 땅, 인간을 하나로 보는 삼재(三才) 인식이 있어요. 제 그림을 보는 사람이 이 삼박자를 느낀다면 좋겠습니다."
※ 이 기사는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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