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에 달린 ‘돼지 콧구멍’ 닮은 가죽장식…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그거사전 - 22] 가방에 돼지코 닮은 마름모 장식 ‘그거’
래쉬 탭은 ‘(밧줄로) 단단히 묶는다’를 뜻하는 래쉬(lash)와 식별표·꼬리표를 의미하는 탭(tab)을 합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건을 매다는 용도로 쓴다. 구멍 사이로 끈, 카라비너 등을 통과시켜 물건을 묶거나 매달 수 있다. 애초에는 등반가들이 얼음도끼(피켈)를 달고 다니기 위한 용도였고, 쉽고 빠르게 접근해야 하는 장비를 매달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밧줄이나 침낭 등 부피가 커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이나 비옷, 등산화처럼 다른 물건과 섞이면 곤란한 지저분한 물건들을 가방 밖에 매달 때 쓸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도의 배낭이라면, 래쉬 탭은 장식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허셜 공동 창업자인 제이미 코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래쉬 탭은) 옛 등산용 배낭과 과거에 대한 경의”라며 실용성보다 상징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얼음도끼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해서는 래쉬 탭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우선 가방 하단에 있는 고리 - 제조사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흔히 장비 고리(gear loop)나 얼음도끼 고리(ice axe loop)라고 한다 - 에 얼음도끼를 통과시킨 후, 거꾸로 뒤집어 래쉬 탭에 도낏자루를 고정하는 방식을 권장한다. 물론 이는 얼음도끼를 매달 때의 얘기고 물건을 매달거나 고정하는 용도로는 지금도 충분히 유용하다.
선조들이 선사 시대 때부터 가방을 만들어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배낭 역시 상당히 이른 시점에 등장했으리라 추정하지만 구체적인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가죽이나 식물 섬유를 재료로 삼은 배낭이 원형 대로 보존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있는 사료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낭은 기원전 3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배낭의 주인은 외치(Ötzi). 일명 ‘아이스맨’으로 불리는 미라다.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해발 3,200m 고도의 알프스산맥에서 발견된 남성 미라로, 약 5300년 전 청동기에 사망한 인물이다.
눈과 얼음, 빙하에 파묻혀 냉동된 덕에 시신뿐만 아니라 가죽옷과 나무 활·구리 손도끼 같은 소지품까지 온전하게 보될 수 있었다. 이 당시 발견된 소지품 중에는 나무 배낭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U자 형태로 휘어있는 2m 길이의 개암나무 막대와 길이 38~40㎝의 좁은 낙엽송 나무판 두 개가 나왔는데, 학자들은 막대와 나무판을 끈으로 묶어 틀로 만든 뒤, 가죽 자루나 그물을 매달아 배낭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외치의 배낭 이후, 이렇다 할 만한 극적인 사건 없이 5000여 년이 흘렀다. 배낭의 시곗바늘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 노르웨이에 Sekk med meis(프레임·틀이 있는 가방)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다. 1874년에는 미 육군 헨리 클레이 메리엄 대령이 외부 프레임 배낭 디자인 특허를 최초로 출원했다. 하중을 분산시켜 보병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야심 찬 발명이었지만 지독하게 불편한 탓에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1938년에는 게리 커닝햄이 끈과 버클이 아닌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배낭을 만들어 게임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이후 알루미늄 프레임, 허리 벨트, 패딩 어깨끈, 내부 프레임, 힙 벨트 등 신기술·신소재가 속속 도입되며 현대적인 등산용 배낭이 완성됐다.
여기까지만 짚어봐도 ‘야생의 에디슨’ 수준인데 아직 큰 게 남았다. 지퍼 배낭 발명 이후 30년이 지난 1967년, 그의 손에는 세계 최초의 경량 나일론 티어드롭 배낭이 들려 있었다. 이 물건은 이후 모든 나일론 배낭, 일상용 경량 배낭의 시초가 된다. 이쯤 되니 에디슨을 ‘인도어 게리 커닝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아무튼 그는 1971년 자신이 세운 회사가 너무 커져서 재미없다(too big and no fun)는 이유로 사임하고 항해 및 선박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계속했다. 퇴장마저 멋있는 이 남자는 대체.
사업 초창기엔 산악인을 위한 전문가 배낭에 초점을 맞췄지만, 캠핑·야외활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시점에 게리 커닝햄의 나일론 배낭에서 영감을 얻은 경량 배낭 제품군 ‘데이팩’을 내놨다. 워싱턴대학 스포츠용품 매장에 깔린 가벼운 배낭에 매료된 학생들은 너도나도 최초의 책가방을 구매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배낭은 캠퍼스를 장악하게 된다.
혁신은 등장과 동시에 그 빛을 잃어간다. 시대를 풍미했던 흔적은 이내 닳고 퇴색돼 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위대했던 출발점을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사라져 간다.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모양의 저장 아이콘처럼, 다이얼 전화기의 수화기를 꼭 닮은 통화 버튼처럼, 그리고 아이 방구석에 후줄근하게 구겨져 있는 책가방처럼. 하지만 탐험가의 기억을 간직한 래쉬 탭처럼, 영광의 시대를 살아내고 이윽고 일상이 된 늙은 혁신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기억될 자격이 있다.
- 다음 편 예고 : 뜯다가 짜증 폭발하는 플라스틱 포장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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