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에 달린 ‘돼지 콧구멍’ 닮은 가죽장식…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6. 15. 09: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거사전 - 22] 가방에 돼지코 닮은 마름모 장식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래쉬 탭이 달린 가방은 떡볶이 코트와 함께 아련한 청춘 영화의 소품으로 손색이 없다. [사진 출처=Usama, unsplash]
명사. 1. 래쉬 탭 2. 돼지주둥이(pig snout)【예문】무척 아끼는 가방 래쉬 탭에 누군가 라면 국물이 배어있는 나무젓가락을 꽂아 두었다. 나는 조용히 야구 방망이를 들고 동생 방문을 열었다.

래쉬 탭(lash tab)이다. 마름모로 된 패치에 돼지 콧구멍 모양으로 긴 구멍이 2개 나 있는 형태다. 가죽 소재가 많았지만 고무와 플라스틱 재질도 많이 쓴다. 일반적으로 배낭의 중앙 부분에 붙어 있다. 도무지 쓸모라곤 보이지 않아 멋내기용 디자인인가 싶지만, 브랜드를 막론하고 부착된 점도 의문이다.

래쉬 탭은 ‘(밧줄로) 단단히 묶는다’를 뜻하는 래쉬(lash)와 식별표·꼬리표를 의미하는 탭(tab)을 합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건을 매다는 용도로 쓴다. 구멍 사이로 끈, 카라비너 등을 통과시켜 물건을 묶거나 매달 수 있다. 애초에는 등반가들이 얼음도끼(피켈)를 달고 다니기 위한 용도였고, 쉽고 빠르게 접근해야 하는 장비를 매달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밧줄이나 침낭 등 부피가 커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이나 비옷, 등산화처럼 다른 물건과 섞이면 곤란한 지저분한 물건들을 가방 밖에 매달 때 쓸 수 있다.

배낭 안에 넣을 수 없거나, 넣고 싶지 않은 물건은 래쉬 탭을 이용하면 쉽게 거치할 수 있다. [사진 출처=uniqueleatherbags.us]
등산용 배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래쉬 탭이 학생용 책가방에까지 진출할 수 있던 것은 캐나다의 가방 제작업체 허셜(Herschel supply Co.) 덕분이다. 허셜은 세련된 마름모 형태의 가죽 패치로 재해석한 래쉬 탭을 자사의 배낭에 부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잔스포츠(jansport) 등 다른 아웃도어 배낭 브랜드도 도입하면서 보편화됐다. 허셜의 래쉬 탭 사랑은 참으로 지극한데, 배낭 모델은 물론이고 더플 가방, 크로스백, 심지어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의 트렁크 가방에까지 래쉬 탭을 붙여놨다. 이쯤 되면 브랜드 로고 수준이다. 틀린 말도 아닌 게, 사람들은 허셜 브랜드는 몰라도 ‘마름모 돼지코 그거’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마름모 모양의 현대적인 ‘래쉬 탭’을 유행시킨 허셜의 제품들. 브랜드 로고보다 래쉬 탭이 상석이다. 배낭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래쉬 탭 우리 거예요. 우리 거라고요!” 소리 지르는 수준이다. 몰라봐서 미안했다. [사진 출처=허셜 홈페이지]
배낭이 등산가나 탐험가를 위한 ‘장비’에서 일상생활에서 쓰는 책가방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래쉬 탭도 은근슬쩍 함께 따라왔다. 세상 게으른 고도비만 고양이에도 사냥 본능이 남아있는 것처럼, 책가방으로 살면서도 야생을 누비던 탐험가의 성정(性情)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도의 배낭이라면, 래쉬 탭은 장식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허셜 공동 창업자인 제이미 코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래쉬 탭은) 옛 등산용 배낭과 과거에 대한 경의”라며 실용성보다 상징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얼음도끼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해서는 래쉬 탭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우선 가방 하단에 있는 고리 - 제조사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흔히 장비 고리(gear loop)나 얼음도끼 고리(ice axe loop)라고 한다 - 에 얼음도끼를 통과시킨 후, 거꾸로 뒤집어 래쉬 탭에 도낏자루를 고정하는 방식을 권장한다. 물론 이는 얼음도끼를 매달 때의 얘기고 물건을 매달거나 고정하는 용도로는 지금도 충분히 유용하다.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얼음도끼 장착 방법. 물론 이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깨끈에 걸거나 하는 방식도 있다. [사진 출처=Glacier Travel and Crevasse Rescue, VDiff Climbing, 2020년]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배낭을 사용했을까. 배낭(背囊, backpack)은 이름 그대로 물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는 주머니다. 배낭은 손이나 자루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짐을 효율적으로 옮길 수 있고, 무엇보다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선조들이 선사 시대 때부터 가방을 만들어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배낭 역시 상당히 이른 시점에 등장했으리라 추정하지만 구체적인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가죽이나 식물 섬유를 재료로 삼은 배낭이 원형 대로 보존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있는 사료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낭은 기원전 3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배낭의 주인은 외치(Ötzi). 일명 ‘아이스맨’으로 불리는 미라다.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해발 3,200m 고도의 알프스산맥에서 발견된 남성 미라로, 약 5300년 전 청동기에 사망한 인물이다.

눈과 얼음, 빙하에 파묻혀 냉동된 덕에 시신뿐만 아니라 가죽옷과 나무 활·구리 손도끼 같은 소지품까지 온전하게 보될 수 있었다. 이 당시 발견된 소지품 중에는 나무 배낭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U자 형태로 휘어있는 2m 길이의 개암나무 막대와 길이 38~40㎝의 좁은 낙엽송 나무판 두 개가 나왔는데, 학자들은 막대와 나무판을 끈으로 묶어 틀로 만든 뒤, 가죽 자루나 그물을 매달아 배낭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1991년 출토된 아이스맨 외치의 배낭 부속품(왼쪽)과 상상력을 발휘해 네티즌이 복원한 외치의 배낭(중앙·오른쪽). [사진 출처=www.iceman.it 이탈리아 남티롤 고고학 박물관 홈페이지, 독일 인터넷 커뮤니티]
우리나라 전통의 지게도 있다. 짐을 얹어서 지고 다니는 기구이다 보니, 엄밀히 말하자면 배낭은 아니지만 왠지 빠지면 섭섭하다. 내 안의 주모가 국뽕을 언급하라 명하고 있다. 1690년(숙종 16년)에 나온 역어유해(譯語類解)라는 책에서는 지게의 뜻을 풀어 배협자(背狹子)라고 적고 있다.

외치의 배낭 이후, 이렇다 할 만한 극적인 사건 없이 5000여 년이 흘렀다. 배낭의 시곗바늘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 노르웨이에 Sekk med meis(프레임·틀이 있는 가방)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다. 1874년에는 미 육군 헨리 클레이 메리엄 대령이 외부 프레임 배낭 디자인 특허를 최초로 출원했다. 하중을 분산시켜 보병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야심 찬 발명이었지만 지독하게 불편한 탓에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1938년에는 게리 커닝햄이 끈과 버클이 아닌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배낭을 만들어 게임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이후 알루미늄 프레임, 허리 벨트, 패딩 어깨끈, 내부 프레임, 힙 벨트 등 신기술·신소재가 속속 도입되며 현대적인 등산용 배낭이 완성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캠프 헤일에서 복무한 게리 커닝햄과 그의 아내 앤 커닝햄.
1938년 지퍼 배낭을 개발해 업계를 뒤집어 놓은 게리 커닝햄(1922~2010)은 5000년 배낭사(史) 공백을 단박에 채울 기세로 혁신적인 발명을 이어간다. 그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삼각형 카라비너(1947), 코드록(매듭 대신 끈을 당겨서 잠그는 장치 ‘그거’·1951),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등정하면서 사용한 텐트(1953), 유아용 캐리어(1959), 최초의 경량 다운 재킷(1960) 등을 내놓으며 아웃도어 장비의 진화를 이끈다.

여기까지만 짚어봐도 ‘야생의 에디슨’ 수준인데 아직 큰 게 남았다. 지퍼 배낭 발명 이후 30년이 지난 1967년, 그의 손에는 세계 최초의 경량 나일론 티어드롭 배낭이 들려 있었다. 이 물건은 이후 모든 나일론 배낭, 일상용 경량 배낭의 시초가 된다. 이쯤 되니 에디슨을 ‘인도어 게리 커닝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아무튼 그는 1971년 자신이 세운 회사가 너무 커져서 재미없다(too big and no fun)는 이유로 사임하고 항해 및 선박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계속했다. 퇴장마저 멋있는 이 남자는 대체.

1967년 ‘아웃도어업계의다빈치또당신입니까기습숭배’ 게리 커닝햄이 내놓은 최초의 경량 나일론 배낭 ‘티어드롭 백팩’. [사진 출처=게리]
등산용 배낭이 학생용 책가방으로 영역을 넓히게 된 배경에는 세계적인 배낭 브랜드 잔스포츠가 있다. 1967년 미국 시애틀에서 아웃도어 매니아 스킵 요웰, 엔지니어이자 스킵의 사촌 머레이 플리츠, 그리고 머레이의 여자친구 잔 루이스가 의기투합해 아웃도어 배낭 사업을 시작했다. 짐작했겠지만 잔스포츠의 이름은 여자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로맨틱하다.

사업 초창기엔 산악인을 위한 전문가 배낭에 초점을 맞췄지만, 캠핑·야외활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시점에 게리 커닝햄의 나일론 배낭에서 영감을 얻은 경량 배낭 제품군 ‘데이팩’을 내놨다. 워싱턴대학 스포츠용품 매장에 깔린 가벼운 배낭에 매료된 학생들은 너도나도 최초의 책가방을 구매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배낭은 캠퍼스를 장악하게 된다.

혁신은 등장과 동시에 그 빛을 잃어간다. 시대를 풍미했던 흔적은 이내 닳고 퇴색돼 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위대했던 출발점을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사라져 간다.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모양의 저장 아이콘처럼, 다이얼 전화기의 수화기를 꼭 닮은 통화 버튼처럼, 그리고 아이 방구석에 후줄근하게 구겨져 있는 책가방처럼. 하지만 탐험가의 기억을 간직한 래쉬 탭처럼, 영광의 시대를 살아내고 이윽고 일상이 된 늙은 혁신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기억될 자격이 있다.

잔스포츠의 주요 ‘책가방’ 제품군. 데이팩(daypack)이라고도 하는 이 배낭들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학생들의 기본템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출처=잔스포츠]
  • 다음 편 예고 : 뜯다가 짜증 폭발하는 플라스틱 포장 ‘그거’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