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동조자’…두 이데올로기의 부조리한 공존, 강요당하는 정체성

한겨레 2024. 6. 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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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조자’
쿠팡플레이 제공

우리는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받는다. 당신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회사 편인가, 노동자 편인가. 반일인가, 친일인가. ‘1찍’이냐, ‘2찍’이냐. 그러나 사람의 성향은 이렇게 단순하게 나뉘는 게 아니다. 진보적이지만 교육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일 수 있다. 노조원이지만 회사의 개혁 방안에 찬성할 수 있다.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지만 일본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할 수 있다. 평생 1번을 찍었지만, 이번엔 2번을 찍을 수 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끝없이 ‘너의 정체’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극단적으로 나뉜 사회, 특히 전쟁을 경험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나의 정체’를 증명하지 못하면 죽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를 다룬 드라마인데 연출과 극본이 무려 박찬욱 감독이다. 드라마 ‘동조자’는 지난 4월 에이치비오 맥스(HBO MAX)에서 공개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쿠팡플레이에서 지난달 30일 종영했다.

베트남이 통일된 직후 어느 교화소. 초라한 행색의 군인이 심문을 받고 있다. 자신을 추궁하는 군인들에게 동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도 분명 북베트남의 군인이다. 그런데 왜 교화소에 갇혀 자신의 행적을 하나하나 적고 있는 걸까. 시간은 남베트남의 패망 두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이 사람은 놀랍게도 남베트남군의 대위다. 심지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방첩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 이 사람의 진짜 정체는 북베트남이 남쪽에 침투시킨 첩자다. 전쟁의 판세는 이미 기울었고 미군은 철수 날짜만 저울질하고 있다. 대위의 임무는 통일된 조국에서 처단할 반동분자들, 즉 남베트남의 비밀경찰들의 명단을 입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역설적으로 지금은 적들이 동지들을 잡는 일을 돕고 있다.

대위가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은 그가 프랑스 혼혈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경험이 있어서 영어가 유창하다. 그러니 양쪽 모두 그가 필요하다. 사이공이 함락되자 대위는 통일 베트남에 남으려 하지만, 공산당은 그에게 미국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미국으로 가게 된 공산당 요원. 과연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쿠팡플레이 제공

베트남계 미국인인 응우옌비엣타인이 쓴 소설이 원작이다. 이 책은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과 갇혀 있는 주인공의 비밀, 스파이가 스파이를 찾는 아이러니.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흥미롭다. 박찬욱 감독 작품답게 수많은 상징이 넘쳐난다. 우리는 끝까지 주인공의 이름을 모른다. 드라마 속에서는 그저 ‘대위’거나 ‘친구’ 혹은 ‘당신’으로 불린다. 두 세계를 떠도는 귀신 같은 존재. 어느 쪽에도 정착할 수 없는 주인공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드라마의 두번째 주인공이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점이다. ‘로다주’는 여기서 미 중앙정보국 요원, 동양학 교수, 정치인, 영화감독 등 1인 4역을 수행한다. 모두 강대국 미국의 편견 가득한 백인 남성 역할이다. 왜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는 걸까? 드라마 중반부에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현장. 대위의 친구가 영화에서 여러 베트남 사람을 연기하는 것을 보면 납득이 간다. 미국인이 동양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무거운 주제의 드라마지만 연출은 경쾌하고 재기발랄하다.

이 드라마는 한편의 완벽한 부조리극이다. 대위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탈출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남베트남에 더 충성하는 사람을 골라야 하지만 자신의 원래 역할은 그들은 처단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선택은 ‘유능해 보이지만 무능한 사람’을 골라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미국에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갔다가 암살 대상자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 차 대접을 받는다. ‘베트콩’을 때려잡는 특수부대 출신인 친구는 미국 사회에 적응을 못하지만 영화에서 베트콩을 실감 나게 연기하면서 활력을 되찾는다.

경계에 선 사람들, 사선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떠오른다. 남쪽이냐, 북쪽이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선택을 강요받지만 모두에게 의심받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이면서 외국 동포들은 지금도 겪는 현실이기도 하다. 의심받는 주인공의 현실은 안타깝지만, 박찬욱 감독은 언제나 의심 없이 신뢰할 수 있었다. 믿고 보자.

씨제이이엔엠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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