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극한의 스포츠 아닌 축제죠!
-빵빵런·수육런·장보기런까지 ‘완주’ 보다 ‘이벤트’에 주목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방송연예대상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생활 체육인들에게 마라톤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한 운동이지만, MZ세대에게 마라톤대회는 ‘축제의 장’에 가깝다. 기록을 남기기보다는 사진을 남기고, 완주 메달보다는 먹거리나 기념품에 의지를 불태우는 그들만의 마라톤 축제 현장을 찾아가 봤다.
뛰는 사람 위에 즐기는 사람? 마라톤, 먹고 즐기는 운동으로
마라톤대회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다부진 체격에 선팅이 완벽한 스포츠 선글라스를 낀, 누가 봐도 동네에서 ‘좀 뛴다’ 싶은 준선수급 러너들이 마라톤대회를 이끄는 주인공이었다. 이제는 누가 더 빠른 기록으로 완주했냐는 중요하지 않다. 더 튀고 독특한 복장으로 시선을 끌며 달리는 자가 대회의 ‘챔피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2030세대에게 마라톤은 극한의 스포츠가 아닌 놀이문화가 됐다. 이들에게 완주나 기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기 중간에도 기분이 내키면 잠시 멈추고 소셜미디어용 인증사진을 찍기 바쁘다. 마라톤대회의 소비층이 바뀌면서 이색 콘셉트로 무장한 대회도 앞다투어 생기고 있다. 42.195㎞ 풀코스도 줄어드는 추세다. 마라톤 입문자부터 러너까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5㎞와 10㎞ 코스만 있는 대회가 늘었다.
‘빵에 진심입니다만, 살찌는 건 싫은 빵둥이들의 마라톤’이라는 구호를 걸고 기념품으로 각종 빵을 나눠주는 마라톤대회 ‘빵빵런’은 4년째 흥행하며 젊은층에 스테디셀러가 됐다. 마라톤과 다이어트의 주적으로 손꼽히는 빵을 결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귀여운 기획을 담아낸 마라톤인 만큼 참가자들도 각종 빵 아이템으로 꾸민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면서 현장은 마치 빵축제를 방불케 한다. 올해부터는 주최 측도 참가자들의 코스프레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순위 경쟁 이외에 ‘빵빵룩 어워즈’ 프로그램을 새로 개설했다. 기록이 아닌 패션으로 겨루겠다는 참가자들에게도 상을 수여한다.
“막걸리 마시는 마라톤이라니”…950명 모집에 10만명 북적북적
주최 측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젊은이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마라톤도 있다. 해당 지역 구청이 주최하는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다. 지난 5월 참가자 950명을 모집하는 ‘조촐한’ 동네 마라톤대회에 신청 당일 10만여명이 몰려 홈페이지 서버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참가비 1만원에 수육과 두부김치, 막걸리까지 준다는 소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지면서 다른 지역 젊은이들이 대거 몰린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라는 정식 명칭보다 ‘수육런’으로 익숙하다.
대회를 주관한 금천구 육상연맹 이광남 회장은 “초창기에는 인원수를 다 못 채우는 대회였는데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올해는 넉넉하게 수육 600근을 준비했지만 다 나갔다. 한 참가자는 5번이나 더 가져다 먹었다고 하더라”며 “젊은 친구들이 계기야 어찌 됐든 운동하고 땀 흘리며 중장년층과 어우러지는 장이 만들어진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주최 측은 당연히 적자다. 금천구청, 금천구체육회, 금천경찰서, 희망병원 등 지역 단체의 협조와 지원금을 보태 대회를 치를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올해는 막걸리 회사의 협찬이 있었고 돼지고기 협찬 제의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어 다음 대회는 더욱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도했다. 대회 규모를 키워 참가자를 더 늘려달라는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이 회장은 “서버 오류로 1000명 넘게 환급해드리는 상황이 있었다”며 대회를 즐기지 못한 이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대회 참가 인원을 늘리는 것은 안전과 운영 시스템 보강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수육런’이 더 많은 사람이 찾는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는 뜻을 전했다.
지난 9일에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배달의 민족’이 진행한 ‘장보기 오픈런’ 대회가 열렸다. 대회 당일 제공되는 장바구니를 ‘득템존’에 있는 물품으로 채운 후 5㎞를 완주하면 바구니 속 모든 상품이 내 것이 되는 이색 마라톤대회다.
완주보단 ‘잿밥’…베스트드레서상을 노리는 참가자들
즉석밥, 컵라면, 음료수부터 각종 요리용 소스까지…. 올림픽공원 평화의광장에 차려진 ‘득템존’은 마치 마트 식품 매대를 그대로 옮겨온 듯 다양한 물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념품을 원하는 만큼 담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기획으로 얼리버드표와 일반표를 포함해 1분 만에 2000명 규모의 참가 신청이 마감됐다.
‘장보기 오픈런’은 여느 마라톤 경기와 달리 5㎞ 완주 제한을 2시간으로 충분히 두었다. 무리해서 뛰지 말고 걸어도 된다는 뜻이다. 기록 경쟁도 하지 않는다. 주최 측은 베스트드레서, 득템왕(가장 무거운 장바구니로 완주한 사람)을 선정한다. 그래서일까? 견물생심의 현장이었다. 대부분 참가자가 5㎞ 코스 뛸 생각은 잠시 접어주고 장바구니 물건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참가자 정재유·김새별씨는 각각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참가했다. ‘혼수 장만’이라고 쓴 결의의 빨간 머리띠까지 동여맸다. 가벼우면서 요리에 꼭 필요한 ‘코인 육수’를 왕창 쟁이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중성마녀가 배달앱을 과하게 쓰다 살이 찐 콘셉트라며 캐릭터 에어슈트를 입고 온 3인도 있었다. 대전의 한 건축사무소 직장 동료인 세 사람은 평소 마라톤을 즐겨 의기투합했다. 의상 회의를 비롯해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는 이들은 다소 ‘육중한’ 코스프레로 인해 장보기는 포기하고 베스트드레서를 노리고 있다고 밝혔다.
장바구니 채우는 데 여념이 없는 이들과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참가자도 눈에 띄었다. 스님 복장의 참가자는 목탁을 두드리며 경쟁자들의 ‘안전 러닝’을 기원했다. 그는 “무소유 정신으로 장보기는 하지 않지만 베스트드레서 상품권 10만원권은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참가자는 중성마녀 3인방 등 4개팀과 함께 베스트드레서상을 받았다.
‘장보기 오픈런’ 프로젝트 총괄을 맡은 김수연씨는 “2030 트렌드 리스트에 ‘마라톤’이 있을 만큼 그들에게는 놀이문화가 됐다”며 “실제 ‘득템’과 연결되는 장보기와 마라톤을 결합해 모두가 즐거운 축제 현장을 만들고 싶었다”는 기획 의도를 전했다.
‘마라톤’이라고 쓰고 ‘축제’라고 읽는 행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인증사진 SNS 이벤트 참가자 중 1명을 선정해 버스정류장 광고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앱 인증형 마라톤대회 ‘석촌호수 나이트런’이 6월30일까지 진행되고, 오는 8월17일에는 닭강정과 맥주를 제공하는 ‘서머 나이트런’이, 8월31일에는 치킨과 맥주에 막걸리도 제공하는 ‘단양 달빛 레이스’가 열린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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