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아우슈비츠, 지금의 가자지구 [비장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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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아빠의 눈을 가리고 마당으로 데려간다.
"서프라이즈!" 엄마 품에 안긴 갓난쟁이 막내 포함 5남매가 아빠 생일을 축하하며 키득대는 아침.
다복한 가정을 이룬 남자의 여유와 웃음이 묻어나는 출근길.
아내가 동네 친구들과 수다 떠는 부엌 바로 옆방에서 손님은 남편에게 열심히 신제품의 성능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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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조너선 글레이저
출연:크리스티안 프리델, 산드라 휠러
출근하는 아빠의 눈을 가리고 마당으로 데려간다. “서프라이즈!” 엄마 품에 안긴 갓난쟁이 막내 포함 5남매가 아빠 생일을 축하하며 키득대는 아침. 다복한 가정을 이룬 남자의 여유와 웃음이 묻어나는 출근길. 그날 오후, 남편이 손님을 데리고 돌아온다. 아내가 동네 친구들과 수다 떠는 부엌 바로 옆방에서 손님은 남편에게 열심히 신제품의 성능을 설명하고 있다.
“소각실 두 개가 서로 마주 보는 구조인데 한쪽의 온도가 대략 1000도까지 치솟을 때 다른 한쪽은 40도 정도로 떨어집니다. (하나가 타는 동안 다른 하나는 식으니까) 소각로를 쉴 새 없이 돌리는 게 가능하죠.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 그걸 반복하는 겁니다. 한 번에 500명씩, 하루 종일.”
바로 이 순간. ‘500’이라는 숫자 뒤에 사람을 세는 단위 ‘명’이 아무렇지 않게 따라붙는 순간. 영화가 보여주는 건, 그저 꼼꼼히 설계 도면을 살피는 주인공의 얼굴. 회사가 발주한 신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흔한 직장인의 표정. 하지만 그의 이름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다. 그가 총책임자로 일하는 직장의 이름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다.
“가해자를 다룬 영화들은 예전에도 있었죠. 아주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요. ‘우리와는 다른 인간들이야’ 하는 태도죠. 그런데 이 영화의 태도는 뭐냐면, 가해자들과 우리가 비슷한 점이 뭔지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그들’도 인간이고, 우리가 ‘그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영화에 담긴) 이 모든 평온한 일상은 극한의 공포가 됩니다(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인터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 보도자료).”
악명 높은 나치 전범 회스의 가족은 실제로 수용소와 담장을 나눠 쓰는 사택에 살았다. 아내 헤드비히(산드라 휠러)는 특히 정원을 가꾸는 데 열심이었다고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영화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보금자리를 재현한다. 꽃밭과 온실과 풀장이 있는 집 안에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펼쳐진다. 수용소 안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가스실로 들어가는 유대인의 행렬 같은 건 이 영화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 이 영화가 제일 섬뜩했다. 꽃을 심는 헤드비히의 등 뒤로 쉼 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에서, 도로 소음처럼 시종 무심하게 담장을 넘어오는 먼 비명소리에서, 살 타는 냄새를 맡았는지 때때로 살짝 찌푸리는 방문객의 미간에서, 나는 전쟁과 학살의 맨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결국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다. “난 죽어도 여기 못 떠나. 그동안 꿈꿔왔던 삶이잖아.” 이 한마디에 당신도 나처럼 붙들릴 것이다. 나는 정말 아닐까? 나는 정말 다를까? 담장 너머만 모른 척하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는데도 애써 그 담장을 무너뜨릴 용기가, 나에겐 있을까?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가자지구를 언급했다. 다시금 ‘비인간화의 희생자’가 속출하는 전쟁을 비판하며 그는 말했다. “(이 영화는) 현재의 우리와 마주하고 성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때 무엇을 했는지 지켜보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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