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 있든 없든 별 상관 없지만…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6. 1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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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임지은 시인의 ‘간단합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부사
나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
타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존재

간단합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싶다면 시계를 보면 됩니다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고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
지워 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사를 사랑합니다

한없이 가벼운 자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지를 신뢰합니다

설탕을 빼 버리면 이 세계의 복숭아는 모두 상해버리고
통조림 안의 복숭아는 안전합니다

간단합니다
나는 얼마간 부사가 되어 있겠습니다

그건 검은 해변에 운동화를 놓고 오는 일
잘 닦인 유리창에 지문을 남기는 일
줄넘기 없이 수요일을 뛰어넘는 일

아프리카로는 갈 수 없지만
내일로 갈 수 있을 만큼 다리가 길어집니다

얼굴은 내 것이지만 타인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구름도 어쩔 수 없는 날씨가 있습니다

저기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기분이 넘어집니다
펭귄처럼, 거꾸로, 각별하게

임지은
· 2015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데뷔
·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 시집 「때때로 캥거루」

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 문학과지성사, 2019.

우리는 누군가와 항상 관계를 맺고 있다.[사진=펙셀]

간단하게 살고 싶을 때 우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까. 시간으로부터, 공간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슬픔이나 서글픔으로부터, 외로움이나 그리움으로부터,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나 '어떤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올 때까지 우리는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속을 당하거나 구속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의 양상을 어떤 사람은 당연하다고 느끼며 흘러가듯 살아갈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의문과 반문을 갖고 관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존재론적인 포지션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거기에서 비롯된 섬세한 기분을 예술적으로 승화할 것이다

임지은 시인은 2015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데뷔했는데 "이미지에 대한 변전變轉의 상상력이 과감"하고 "일상적 삶의 풍경들을 간결한 터치로 낯설게 녹여(문학평론가 강계숙, 강동호)"낸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젊은 시인다운 낯선 감각과 세련된 감성이 삶의 풍경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임지은 시인은 위에서 말한 것들 중에 세번째에 해당한다.

'간단합니다'는 그런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다. 시에 등장하는 시 속 화자는 시의 앞부분에서 간단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얼마간 부사가 되면" '얼마간' 간단해질 수 있다고 진술한다. 9품사 중의 하나인 부사를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지워 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 특성을 들어 그것을 확신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가려던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렸다'란 문장이 있을 때 '깨끗이'는 의미상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단어다. 그런데 '깨끗이'가 없다면 결론과 상관없이 발화자가 가진 태도나 의지는 크게 달라진다. '깨끗이'가 없을 땐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나의 태도를 다르게 결정할 것 같은 예감이 풍기지만 '깨끗이'가 있을 땐 더이상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니 부사는 태도나 의지가 갖는 강약과 깊고 얕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인 셈이다. 그런 부사를 사랑해서 화자가 "얼마간 부사가 되어" 있겠다고 한 것은 상황이나 결론을 바꿀 순 없지만 태도만을 분명히 품고 그 자리에 있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것은 간단하게 불행해지는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른다. 동사나 형용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에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가 없으면 존재의 이유도 사라진다. 그렇게 부사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영향 아래"에 있는 자신을 암담하게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구름도 어쩔 수 없는 날씨가" 있는 것처럼 자신도 어쩔 수 없게 자신의 쓸모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자리. "한없이 가벼운 자세를 지니고" 있지만 기분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렇다면 부사의 역할을 버리고 과감하게 떠나면 되지 않을까.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일이 될 것이다. 화자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관계의 단절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버리는 일만큼 두려운 일이다. "펭귄처럼, 거꾸로, 각별하게"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기분이" 넘어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따라서 간단하다는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부사인 자신을 알아주길(연결해 주길) 바라는 태도에서 비롯된 간편한 관계 맺음의 한 양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부사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규격화한 "통조림 안의 복숭아"처럼 그저 안전한 상태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통조림 속 복숭아는 안전할지 모르지만 통조림을 딸 때까지 타자와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그 어떤 기분도 가질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러니 타자와의 관계는 시의 제목처럼 진짜 간단할 수만은 없다.

간단하다고 말하지만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타자가 등 돌리게 않게 하면서 태도를 부여잡는 일은 현대인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명사ㆍ대명사ㆍ수사ㆍ동사ㆍ형용사ㆍ관형사ㆍ조사ㆍ부사ㆍ감탄사 역할 중에서 어떤 하나라도 가지고 있어야 존재의 이유와 관계의 지속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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