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혹사시킨 땅, 다시 자연 상태로
재야생화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작 ‘와일딩’
영국인 부부, 척박했던 농장 땅
3년간 땅 갈고 식물 키워 베어내
생명다양성 감소·기후위기 반성
“짹짹 쪼로롱.” 주황과 회색 빛깔의 깃털로 뒤덮인 나이팅게일이 검은 부리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목청껏 노래한다. “구우 구우우우.”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알록달록 화려한 날개를 접은 멧비둘기가 지저귄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새들의 출현에 영국 남부 웨스트서식스주 넵캐슬 지역에 사는 이저벨라 트리(60)는 압도되고 만다. 나이팅게일은 전국적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면서 이 지역에서 거의 사라진 듯했고, 더구나 멧비둘기는 영국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넵 지역은 영국에서 멧비둘기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지난 5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개막작인 ‘와일딩’의 주요 장면이다.
‘와일딩’은 트리가 20여년 동안의 넵 지역 ‘재야생화’ 과정을 기록한 같은 제목의 책(국내에선 ‘야생 쪽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재야생화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자생력으로 역동적인 생태계가 구축되도록 하는 자연 복원 전략이다.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생명다양성이 천연자원과 종간관계의 복잡한 그물망에 의지하고 있으며, 생명다양성의 감소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멸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원래 ‘경작되지 않은 상태’로
남편 찰리 버렐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재야생화 실험 중이었기에, 사라진 새들이 돌아온 ‘성과’에 트리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뿐 아니라 보기 드문 번개오색나비와 쇠똥구리 등 곤충들이 번성했고, 황폐해진 토양이 지력을 회복하는 등 큰 변화가 이어졌다.
3500에이커(약 428만평) 규모의 넵 지역은 버렐이 1987년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다. 이곳에서 트리 부부는 젖소를 키우며 낙농업을 했고, 밀·콩·보리 등 농사도 지었다. 그러나 우유 가격은 변동 폭이 컸고 저렴한 수입 곡물과도 경쟁해야 했기에 트리 부부가 15년 동안 흑자를 낸 건 2년뿐이었다. 이들은 제초제와 인공비료 등을 쓰는 현대식 농업을 통해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다 1999년 “우리가 보는 나무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땅 밑에서 일어나는 생태 작용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식물학자 테드 그린을 만나 영감을 얻었고 2000년부터 재야생화 실험에 나선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정부로부터 프로젝트를 수행할 재정 지원도 받았다.
우선 척박한 상태의 토양을 원래의 ‘경작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십년간 땅에 줬던 비료(질산염과 인산염)의 농도를 줄이는 과정이었다. 땅을 쟁기와 로터베이터(회전 날이 달린 경운기)로 갈고 식물들을 심어 자라게 한 뒤 베어내는 작업을 3년간 되풀이했다. 트리 부부는 “3년째 되던 해에 토종 활엽 꽃식물과 풀들에 유리하도록 토양을 바꿨다고 생각했고, 화학비료 농도 감소만으로도 대정원의 참나무들에 이로웠다”고 말했다. 또 다마사슴, 헤크소, 엑스무어조랑말 등 다양한 초식동물도 살게 했다.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식동물까지 들어오면 생물다양성을 더욱 증진시킬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재야생화 실험은 난관의 연속이기도 했다. 트리 부부는 개념도 생소한 재야생화에 대해 이웃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했다. 또 잡초인 금방망이나 엉겅퀴아재비가 맹렬하게 퍼져나갈 땐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찾아온 공무원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중단하게 할 수도 있다는 엄포를 듣기도 했다. 지난 7일 서울 메가박스 성수에서 ‘와일딩’ 상영 뒤 관객과 영상으로 대화한 데이비드 앨런 감독은 “영국에서 재야생화는 논쟁적인 이슈”라며 “땅을 다 농지로 활용해 먹거리를 생산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며 재야생화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그러나 넵 지역에서는 30명 안팎의 자연주의자와 학자 등으로 ‘황무지 자문위원회’가 구성돼 재야생화 프로젝트 진척을 도왔다. 프로젝트 시작 18년 만에 넵 사유지는 환경식품농무부의 25개년 환경계획에서 ‘자연을 회복하는 경관 규모 복원’의 탁월한 사례로 선정(2018년)됐고, 유럽연합에 ‘긍정적 농촌 환경’을 마련한 공로로 안데르스 발 환경상을 수상(2017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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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국 92개 프로젝트 진행 중
재야생화는 1980년대 말 미국 환경운동가 데이브 포먼과 복원생태학자 마이클 술레가 대형 야생동물이 다시 활동하는 북미 대륙을 상상하면서 처음 아이디어가 나왔다. 북미 재야생화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은 미국 최초 국립공원인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회색늑대 재도입이다. 과도한 개체수의 엘크와 사슴의 먹이 활동으로 이곳 식생은 황폐해졌다. 1995년 회색늑대가 인위적으로 재도입되면서 엘크와 사슴의 수가 줄었고, 초목이 새롭게 자라났다. 늑대 같은 상위 포식자가 생태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핵심종이고, 생태계의 다양성을 높이는 톱다운 방식의 개입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드넓은 북미와는 달리 높은 인구밀도, 토지의 집약적 이용 등의 특성을 띠는 유럽에서는 방치된 농경지·방목지 등을 ‘생산적으로 방치’하거나 소나 말 등의 초식동물을 도입해 생태 작용을 활성화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유럽에서는 1960년대부터 산업 구조 변화로 농촌 인구가 줄면서 방치되는 농경지나 땅이 증가했다. 재야생화는 이러한 지역을 생태적으로 복원해 관광 등에 활용하는 방식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의 국립공원 오스트파르데르스플라선(1989년 람사르 습지 지정)이다. 20세기 후반 네덜란드 생물학자 프란스 베라가 암스테르담 외곽에 버려진 6000헥타르(1815만평) 간척지인 이곳을 재야생화하는 프로젝트에 나섰다. 이와 관련해 베라가 쓴 책 ‘숲의 역사와 방목 생태학’이 영문으로 번역된 2000년 재야생화를 막 시작하려던 트리 부부는 이곳을 방문해 큰 영감을 얻었다. 그 뒤 유럽 환경운동가와 연구자들은 2011년 ‘리와일딩 유럽’을 결성했다. 리와일딩 유럽 누리집을 보면, 현재 29개 유럽 국가들에서 92개의 재야생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도시 재야생화’로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2년 ‘2030년까지 생물다양성 도시, 변화하는 도시와 자연과의 관계’ 보고서를 내어 “도시들이 자연 손실과 기후변화를 되돌리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생물다양성 도시는 도시의 경제·사회·생태적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생활 시스템으로 도시의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해 런던동물학협회(ZSL)는 ‘우리 도시 재야생화’ 보고서에서 “생물다양성 손실과 기후위기는 상호 의존적 문제”라며 “도시의 주요 녹지인 공공 정원과 공원의 일부나 전부를 재야생화하면 도시 야생동물의 회복을 크게 촉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그동안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인간 중심적으로 자연을 통제하는 형태로 전개돼온 데 대한 반성 속에서, 재야생화는 자연을 중심에 놓고 인간이 자연과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 맺기를 탐색하는 실험적인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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