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에 납치돼 아버지까지 잃었는데…국가는 여전히 “소멸시효” 항변

조일준 기자 2024. 6. 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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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슈
국군의 납치 피해 배상

69년 전 국군이 끌고 온 함경도 부자
유사 사건 판결 보고 지난해 소송
“국가 소멸시효 주장 신의칙 위반”
정부 “부친 보상금은 재판상 화해”
1955년 북한 함경남도에서 남한의 북파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됐던 김성길(82)씨가 지난달 21일 강원도 춘천 집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관련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955년 8월24일 밤, 함경남도 북청군의 바닷가 마을. 소년 김성길(당시 13살)은 더위를 피해 집 앞마당에서 잠을 자다가 “기절초풍할” 봉변을 당했다. 컴컴한 어둠 속 건장한 사내들이 총을 들이대고 잠을 깨웠다. 동해상 휴전선을 넘어 잠입한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북파 공작원들이었다. 소년은 그길로 아버지(당시 53살)와 함께 남한 땅 강원도 고성군의 군 부대로 끌려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볼모로 잡힌 채 특수작전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 10월, 아버지는 휴전선을 넘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부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전사’ 사실을 감추고 두차례나 북파 공작에 동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씨는 아무런 대책 없이 부대 밖 사회로 방출됐다. 세월이 흘러 철부지 중학생은 82살 고령의 노인이 됐다. 그동안 김씨가 숨죽여 살아온 세월은 신산하기 짝이 없다.(한겨레 6월1일치 1면, ‘북에서 끌려온 아들 그리고 아버지’)

김주삼씨 승소 판결 이후

김씨는 지난해 4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자신처럼 북한에서 납치돼 온 김주삼(87)씨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다는 뉴스를 보고서야 자신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김주삼씨는 국가가 항소한 2심에서도 승소해 판결이 확정됐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납치된 민간인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유일한 판결이다. 김주삼씨의 승소에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김성길씨의 재판은 녹록하지 않다. 김주삼씨와 다르게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절차가 없고, 거의 70년 전 사건인 까닭에 피해 사실을 입증할 문서 기록이나 증인을 찾기 쉽지 않은데다, 피고인 국가 쪽의 법률대리인(정부법무공단)이 관련 법들을 근거로 배상 책임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어서다. 이는 과거사 사건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장은 이렇다. “국가배상법에 근거한 손해배상 청구는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고, “망인(원고의 아버지)은 ‘전몰 군경’으로 인정돼 특수임무종사자 보상법에 따른 보상금을 (상속권자인 아들 김씨가) 수령함으로써 ‘재판상 화해’가 성립됐”으며, “원고(김씨)는 자신의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신청을 취하하였는바 (…) 원고가 국군에 납치돼 북파공작에 동원됐다는 사실이 불분명한 일방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멸시효’다. 국가배상법과 국가재정법 등에 따르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단기),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장기)을 경과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 피해자가 더는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가는 또, 다른 특수임무수행자의 소송에서 “당시는 한국전쟁이 종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남북한이 고도의 군사적 긴장관계로 대치하고 있어 국가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상황이었기에 국가가 안보를 위한 조치를 강구함에 있어 상당한 재량이 인정되는 바 이를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 하급심 판결을 지지한 대법원 판례(2011다9815)까지 들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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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소멸시효 주장하지 않으면 된다”

원고 쪽은 국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피해자들이 “순수 민간인 신분으로 강제납치돼 기존의 모든 사회적 관계와 단절돼 강제 억류됐”고, “망인이 자녀(원고)를 볼모 삼은 강요로 위험천만한 공작에 거듭 강제동원당하다가 끝내 사망한 것은 형법상 특수체포감금치사상죄와 인질강요치사상죄에 해당돼 재판상 화해의 효력 범위를 훨씬 벗어났다”는 것이다. ‘소멸시효’와 관련해선 “과거사정리법상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등에서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 집행으로 입은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은 장기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여러건의 대법원 판례(2021다202903 등)를 들어 배척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여기에는 “(소멸시효에 해당하는 시기에) 원고가 가해자들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고의 나이, 경험, 교육 수준, 시대 상황 등에 비추어 피고의 위법행위의 법령상 근거를 추적하기 어려웠고, 피고가 원고의 권리 행사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정도 깔려 있다.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재판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원고 김성길씨의 사례는 앞서 지난해 7월 항소심에서도 승소한 김주삼씨의 사례보다도 더 비인간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김성길씨는 자신의 사례가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대상이 되는지를 김주삼씨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김성길씨는 “우리 같은 피해자도 진실규명 대상에 해당하는 걸 몰랐던데다, 피랍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상당 기간 국가의 사찰까지 당했다”고 털어놨다.

육군 정보국 소속 첩보부대(HID) 소속으로 동해 지역을 관할하는 36지구대에서 북파 공작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전사·순직한 대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세워진 모습. 김성길씨와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납치돼 36지구대로 끌려온 뒤 북파 공작원 교육과 침투 공작에 동원됐다. 국가보훈부 자료실 갈무리

김씨의 법률대리인 이강혁 변호사는 “김씨에 대한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허용한다면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이 오직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는지에 따라 소멸시효와 권리 구제 여부가 좌우되는 부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산하 과거사청산위원회의 임재성 변호사도 “국가의 심각한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이다.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지 않으면 법원은 판단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과거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소멸시효 관련 판례는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인) 장기 시효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이어서, 지금 과거사 국가배상 소송들은 단기 시효(3년)의 배제 여부를 두고 법리 다툼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김성길씨 재판에서는 관련자 증언이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다. 김성길씨 쪽은 납치됐을 당시 육군 첩보부대 소속 군인 중 유일한 생존자를 찾아 증인 신청을 한 상태다. 희망적인 선례도 있다. 지난해 5월, 진실화해위는 김주삼씨가 조사를 신청한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의 진실규명 과정에서 적극적인 진술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 임아무개씨에게 보상금 700만원을 지급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기여자에게 금전적 보상을 한 첫 사례다. 김주삼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재판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하면서 임씨의 진술을 수용했다. 임씨는 1956년 10월 공군첩보대 소속 북파공작원들이 황해도 연안에서 19살 김주삼을 납치해 왔을 당시 이 부대의 기간병이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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