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죽은 바로 다음날 여자랑 잤어”···패륜 이야기 쓴 소설가의 반전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6. 15.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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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73] “엄마가 오늘 죽었다. 아니 어제였던가. 잘 모르겠다.”

본인을 낳아 준 모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에도, 그의 표정은 심드렁합니다. 회사에 모친상을 알리고, 휴가를 쓰는 것조차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 그의 얼굴에서 어떤 슬픔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왕래도 없는 친척의 상갓집에 하릴없이 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소설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는 좀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알제리-프랑스인(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사람)인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좀처럼 기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패륜을 저지를 때조차 그의 표정은 한결 같습니다.

1967년 이탈리아 영화 ‘이방인’은 카뮈의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사진출처=IMDB]
이글거리는 태양의 강렬함에 이끌린 그는 한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합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목사에게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죽음이야말로 진실된 것”. 분노한 당국에 의해 사형이 내려집니다.

‘이방인’은 ‘부조리주의’(absurdism)의 대표작으로 통합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통찰. 그 속에서 목적을 찾아나선 합리적인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세계의 작동 질서인 혼돈과 닮은 뫼르소는 어쩌면 ‘진리’를 깨달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게 카뮈의 생각이었습니다. 부조리한 인물을 통해 세계의 작동방식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구현한 것이지요.

이 작품을 썼을 때 알베르 카뮈의 나이는 고작 스물 아홉. 30대가 되기 전에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 대문호의 자리에 오릅니다.

알베르 카뮈는 20대에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한 번씩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입니다. 뫼르소는 알베르 카뮈의 자화상일 것이라고. 그도 뫼르소만큼이나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인물일 것이라고.

소설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투영하겠지만,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와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태양’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절절했지요. 뫼르소와 공통점은 알제리-프랑스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만큼 카뮈는 정열이 가득한 위인이었지요.

카뮈의 마음 속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엄마, 지금처럼 엄마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1957년 10월17일 오전, 스웨덴 한림원은 알베르 카뮈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합니다. ‘이방인’을 발표한 지 15년만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44살,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두 번째로 어린 나이였습니다.

카뮈는 그날 알제리 빈민가인 벨쿠르로 전보를 하나 부쳤습니다. 그곳에 사는 어머니 카트린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뫼르소와 달리 그는 어머니를 끔찍이도 아꼈습니다. 가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도 카뮈를 응원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알제리는 프랑스의 땅이다.” 1836년 소마전투를 묘사한 그림. 이 전투로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가 확고해졌다.
카뮈의 가족은 알제리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제국주의가 본격화한 프랑스는 1830년부터 알제리를 지배하고 있었지요(축구스타 지네딘 지단과 카림 벤제마가 알제리 혈통이지만 프랑스 국가대표로 뛴 배경입니다).

많은 프랑스인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알제리로 넘어왔습니다. 카뮈의 조부도 이때 알제리로 넘어온 사람이었지요. 어머니 카트린과 카뮈는 모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알제리-프랑세스’였습니다.

알제리 땅에 도착한 프랑스인들. 그들은 ‘알제리 드림’을 안고 배에 올라탔을 것이다.
가난한 알제리-프랑세스, ‘피에 누아르’
‘알제리 드림’이 모두 실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호의 꿈을 품고 넘어왔지만, 북아프리카의 삶은 억척스럽기만 했습니다. 프랑스 본국에서만큼이나 가난하고, 비루한 삶의 연속이었지요.

프랑스 본토인들은 알제리-프랑스세를 ‘검은발’이란 의미의 ‘피에 누아르’라고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카뮈의 집안도 마찬가지로 멸시를 당하는 ‘검은발’이었습니다.

“형 나는 엄마를 호강시켜 주고 싶어.” 1920년 형 루시앙과 함께 사진을 찍은 카뮈(왼쪽).
1913년 카뮈가 태어나고 이듬해 아버지는 세계1차대전에 참전해 사망합니다. 어머니 카트린은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남의 집 허드렛일을 맡아가며 아들을 사랑으로 키웠지요.

청각장애로 말을 못했지만 그녀는 늘 아이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던 것이었지요. 그의 집은 빈민가에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카뮈를 키운 사람들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 빛과 어머니의 사랑은 카뮈의 글솜씨를 영글게 했습니다. 초등학생인 그는 또래보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학교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었지요. 루이 제르맹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챕니다. 그는 카뮈에게 개인 교습까지 자처한, 그야말로 은사였습니다.
“카뮈야, 너는 돈 걱정하지 말고 글에 전념하거라.” 카뮈의 은사 루이 제르맹 선생님.
카뮈라는 꽃이 행여 돈 때문에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요. 카뮈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이 바로 루이 제르맹인 이유였습니다.
“어머니 다음으로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바로 당신, 루이 제르맹 선생님이었습니다. 작고 불쌍한 나에게 내민 당신의 애정 어린 손길,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루이 제르맹이라는 든든한 거목이 있었기에, 카뮈는 자기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1933년 알제 대학교에 입학해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푹 빠져들었지요. 스탕달, 프란츠 카프카, 허먼 멜빌,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대문호의 철학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가난을 글쓰기의 영감으로 삼은 카뮈
가난한 사람에 둘러싸인 삶. 그가 빈민에 연민을 느낀 건 당연했습니다. 언제나 고통받는 약자의 편에서 글을 써왔지요. 첫 작품의 이름은 ‘아스투리아스의 반란’. 1934년 파업을 일으킨 스페인 광부들이 정부의 진압으로 1500명이나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 당시 경찰에 체포된 파업 광부들. 이 사건으로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카뮈의 작품에 영감을 줬다.
사회에 첫발을 ‘언론’에 디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프랑스로부터 억압을 받는 알제리인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그의 고향은 알제리였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이 살아가는 곳. 그래서 마음이 저리는 곳이었지요.

청년 기자 카뮈는 카빌리라는 지역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알제리인을 취재합니다. ‘카빌리의 빈곤’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억압적 식민정책을 정면으로 고발한 작품이었지요.

카뮈의 어머니 카트린. 카뮈는 어머니와 그의 고향 알제리를 진실로 사랑했다.
감성적인 문체를 씨실로, 촌철살인의 언어를 날실로 삼아 만든 위대한 르포. 그가 직조한 기사에는 카빌리 지역의 고난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가난한 알제리 사람들에게서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모두 화제를 부를 수밖에 없던 작품(실제로 이 기사는 책 ‘시사평론3 알제리 연대기’란 이름으로 출판됩니다)이었습니다. 카뮈를 향해 “알제리를 위해 싸운 유일한 프랑스인”이란 상찬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그는 자랑스레 “나는 프롤레타리아 지성인”이라고 말하곤 했었지요.

알제리를 떠난 카뮈
“저 신문을 폐간시켜라.”

카뮈의 펜촉은 프랑스의 식민정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총독 정부가 카뮈가 일하고 있는 언론사 ‘알제-레퓌블리켕’을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카뮈는 결국 사랑하는 ‘조국’ 알제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언론사 ‘파리 수아르’에서 편집기자 일자리를 얻게 되었지요.

“글쟁이는 자기 글이 누울 곳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지.” Jean Loup Othenin Girard가 그린 카뮈 그림.
100만부에 달하는 부수를 자랑하는 유력지였지만, 그는 그곳에서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권력과의 유착관계가 의심되는 언론사였기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관점이 남달랐던 카뮈는 일갈합니다. “글에 자부심이 있는 글쟁이라면, 아무 데나 글을 써선 안 된다.”
기사 대신 문학으로 꽃 피우다
그의 펜이 완전히 멈춰선 건 아니었습니다. 기사 대신에 그는 문학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에세이 ‘시지프 신하’, 소설 ‘이방인’, ‘오해’가 이때 잉태된 작품이지요. 앞서 언급한 부조리주의를 철학한 명저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혼돈의 시대가 그의 작품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의’라는 개념이 멸종위기에 처한 시기,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뫼르소는 야만의 시대를 대처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카뮈는 그렇다고 소설 인물처럼, 부조리에 순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나치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물밑 지원하는 기관지 ‘컴뱃’에서도 기자활동을 이어갔지요. 나치의 악행을 알리기 위해 그의 글솜씨를 뽐낸 것입니다.

시지프는 신들에게서 영원히 무거운 바위를 언덕 위로 굴려 올리는 벌을 받는다. 카뮈는 시지프의 끝없는 노동이 부조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우리가 이 부조리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지프를 묘사한 그림.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신문 ‘The Combat’에서 일할 당시 카뮈. 가운데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이 카뮈다.
이 시기는 카뮈의 삶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간 시기로 기록됩니다. 여러 문학 작품을 잉태했고, 레지스탕스 언론인으로 활약했으며 또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렸습니다.

1945년 그는 쌍둥이 두 딸 카트린과 잔느를 얻었습니다. 부인 프라신 포레와 사이에서였습니다. 카뮈는 부인이 임신한 동안에 마리아 카사레스와 혼외 관계를 가졌지요.

뉴욕의 젊은 대학생 패트리샤 블레이크와도 열애합니다. 부인 프라신 포레는 우울증을 얻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었지요. 유명 인사를 남편으로 둔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이요. 프랑스 예술가들의 방종한 사생활은 카뮈에게도 마찬가지였던 셈입니다.

“문학인에겐 언제나 사랑이 필요하다오.” 2010년 영화 ‘카뮈’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은 카뮈
“소련도 비판할 줄 알아야 진정한 사회주의자.”

해방 이후 카뮈는 동료 지식인들과 대립합니다. ‘소련’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카뮈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해방구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련 꺼져라. ” 1956년11월 봉기를 일으킨 헝가리 시민들. [사진출처=Jack Metzer]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비판에 매몰돼 공산주의를 낙관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지요. 후에 소련이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을 학살하자, “유엔이 개입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주문한 것도 카뮈였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카뮈는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지성이었습니다.
스탈린 동상을 무너뜨린 부다페스트 시민들. [사진출처=pestisrac2]
알제리 독립전쟁에 카뮈가 ‘침묵’한 이유
1954년 알베르 카뮈는 기로에서 자주 방황합니다. 자신의 조국과도 같은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민족해방전선(FLN)은 더 이상 프랑스의 압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것도 영향을 줬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25만명이 사망하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알제리 독립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없네.” 카뮈.
카뮈는 어느 한편을 지지하지 못했습니다. 알제리의 ‘완전한 독립’은 자신과 같은 알제리-프랑세스의 추방을 의미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알제리를 사랑했더라도, 알제리에게 그는 ‘압제자’ 프랑스의 시민일 뿐이었습니다. 독립국 알제리에서는 카뮈와 같은 ‘피에 누아르’들이 발 붙일 곳이 없었지요.

알제리를 사랑한 식민 모국의 프랑스인. 모순의 존재였던 카뮈에게 수 많은 시민들이 입장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은 알제리의 편인가, 프랑스의 편인가.

알제리인을 고문하는 프랑스군. 1961년.
그는 그럴 때마다 답했습니다. “저는 프랑스의 강경진압을 반대합니다. 그만큼 알제리 해방군의 테러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폭력에 대한 원칙을 천명하면서 식민주의와 독립주의의 사잇길을 걸어간 셈이지요. 카뮈식 제3의 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미래의 천국을 위해서 현재의 지옥을 만들겠다는 이상주의자의 주장을 그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폭력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외친 카뮈
“폭력이라는 수단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렉스프레스지 논설위원 자리에 오른 카뮈 . 그는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저 글로써만이 아니라, 양측을 휴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요.

마침내 1956년 1월 22일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FLN의 첫 대화가 열립니다. 카뮈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지요. “카뮈를 죽이겠다”는 극단주의자들의 협박에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카뮈가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젊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방인’ 속 차갑디 차가운 뫼르소와는 달리 카뮈의 삶은 용광로처럼 달아올라있던 셈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이례적으로 젊은 작가 카뮈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이같은 ‘진정한 윤리의 참여정신’이 작용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극단의 정치적 갈등 속에 그러나 평화주의자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카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측의 무력 충돌은 계속됩니다.

“하수상한 세월이지만 이 평화의 촛불이 영원하기를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 여성에게 촛불 왕관을 씌워주는 카뮈. 촛불 왕관은 스웨덴의 성녀 루시아를 상징한다.
카뮈의 죽음
1960년 1월 4일. 프랑스 중북부의 작은 마을 ‘빌블르뱅’. 이곳에서 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납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이 즉사하는 대형 사고였습니다. ‘알베르 카뮈’였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46세. 사랑하는 어머니를 먼저 두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어머니 카트린은 “너무 젊은데...”라고 읊조리며 아들의 죽음을 속으로 삼켰습니다.그리고 같은 해 8월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제리의 빈민가 벨쿠르에서였습니다. 아들을 대문호로 키웠던 바로 그 자리, 그곳에서였습니다.

카뮈의 죽음을 보도한 컴뱃은 그가 일한 언론사였다.
카뮈와 어머니 카트린이 사랑한 알제리는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962년 3월 완전한 독립을 쟁취합니다. 90만명에 달하는 ‘피에 누아르’가 본국으로 도망치듯 쫓겨나야 했습니다.

카트린이 살아있었다면, 그녀 역시 실향민이 되었을 운명이었습니다. 8년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 수용소 감금, 강간 등의 전쟁 범죄에 대해 알제리인들은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뮈가 사망한 곳에 새겨진 기념비.
꺼지지 않은 꽃
‘작가’ 카뮈가 문학사에 영감을 남겼다면, ‘인간’ 카뮈는 행동하는 지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했습니다. 노벨상 수상 후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의 강연은 여전히 우리를 요동치게 합니다.
“예술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대의 범선’을 타고 있습니다. 이 범선에 악취가 풍긴다해도, 감시원들이 지나치게 많다고 해도, 예술가는 자기 몫의 노를 저어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며, 교조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던 알베르 카뮈. 그가 오늘날 세상을 봤다면, 무엇이라 했을지. 그의 촌철살인의 언어와 감성적인 문체가 그리운 요즘입니다. 너무나 많은 폭력이 아직도 만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항하는 용기있는 지성인이 너무나 부족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주의 문학의 대가이면서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했다.
<네줄요약>

ㅇ카뮈는 ‘이방인’을 통해 엄마의 죽음에도 심드렁한 부조리한 캐릭터를 구현해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ㅇ그러나 ‘인간’ 카뮈는 자기의 소설과는 달리 엄마를 사랑하고 평화를 염원한 누구보다 뜨거운 인간이었다. 바람을 피우는 여성편력도 있었다.

ㅇ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 활동, 헝가리를 억압하는 소련 비판,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ㅇ1960년 1월 47살에 사망한 카뮈는 여전히 ‘행동하는 지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ㅇ이기언, 카뮈와 알제리, 불어불문학 연구 95집,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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