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쌀’ 반도체 사장님, 진짜 쌀로 위스키를 만들다니 [ESC]
삼성·SK 하이닉스 거친 베테랑
외국 대표 ‘와인 자랑’에 경쟁심
은퇴 뒤 증류주 오크통 숙성 ‘결실’
“외국인도 좋아하는 한국 술” 목표
위스키의 성지 스코틀랜드의 섬 아일레이에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섬사람들은 새 생명이 태어나거나 한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면 위스키 한잔을 비운다. 탄생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을 위스키로 기억하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위스키가 붐인 데는 인간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 위스키만의 복잡한 풍미가 있다.
최근 몇 년간 단연 인기는 ‘저패니즈 위스키’의 대명사인 야마자키와 히비키다. 미국 뉴욕 위스키 바에서도 고작 몇 방울 담긴 한잔이 고가로 팔린다. 일본에서도 품귀다.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데는 선구자들의 집념이 있었다. 100년 전 일본 최초로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운 케츠루 마사타카(1894~1979)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제 꿈틀대기 시작한 ‘케이(K) 위스키’ 세계에도 앞서가는 이가 있을까. 2022년 출시해 ‘오픈런’이란 진풍경을 연출한 ‘김창수위스키’의 김창수씨가 대표적 인물로 꼽히지만, 최근 전통주 전문가들이 앞다퉈 호평한‘마한 오크’를 생산하는 ‘스마트브루어리’ 오세용 대표도 그 맨 앞줄에 서 있는 이다. 충북 청주에 있는 ‘스마트브루어리’에서는 우리 쌀로 만든 위스키 ‘마한 오크’가 생산된다.
그는 본래 ‘술’과는 관련 없는, 특이한 이력의 양조자다. 1980년대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가 스탠퍼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석·박사를 따고 아이비엠(IBM)에서 근무한 아이티(IT) 전문가다. 귀국 후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부사장까지 역임하며 15년간 다녔다. 2009년 퇴직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2013년 에스케이하이닉스로 영입돼 ‘제조·기술 부문’ 대표를 맡았다. 2015년 은퇴한 그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우리 위스키’를 만들기로 한 것. 2019년 ‘1인 양조장’을 열어 술을 출시하자 놀라는 이가 많았다. ‘반도체 인생’에 ‘쌀 위스키’는 생뚱맞았다. 그를 지난달 18일 서울 창덕궁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형 라이스 위스키’의 시작
―‘한국 위스키’는 불모지와 다름없는데, 생산자로 나선 이유가 궁금하다.
“우리 술을 외국인들이 부담 없이 마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막걸리나 소주도 한국 대표 술이지만 외국인들이 다가가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술을 고민했는데, 위스키·보드카·진 같은 외국 술을 우리 농산물인 쌀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지난날 ‘반도체 전문가’로서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한번은 그를 만나러 온외국 기업 대표가 자신의 셀러에 있다는 고급 와인을 들먹이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중요한 협상을 두고 ‘밀당’을 해야 할 대상이었다. 상대는 술로 기선 제압에 나선 것이다. “그때 정말 화가 났죠. ‘내가 술을 만들어 (그의) 와인을 깨버리고 싶다’란 생각도 했어요. 지금도 와인은 안 마십니다.(웃음)” 과거 기업인들이 주고받는 선물 대부분이 외국 위스키인 점도 그가 우리 술에 주목한 이유다.
2020년 그는 우리 쌀로 만든 증류식 소주·보드카·진 등을 잇달아 출시했다. 2년 뒤증류식 소주를 참나무로 만든 국내산 오크통에 숙성한 ‘마한 오크’(40도·375㎖, 2년 숙성, 2만4200원)를 내놨다. 이어 46도와 52도짜리도 선보였다. 명색이 위스키인데,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위스키)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을 줄여주지 않으면 판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경쟁력을 지금부터 갖춰야, 규모가 커져도 그 가격을 유지할 수 있고, 외국 업체와 경쟁할 수 있죠. 맛은 기본입니다.” 외국 위스키를 상대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질을 담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아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사업적인 측면은 그렇다고 치고, 맛은 어떨까. 경기도 농업기술원 소득자원연구소 연구사인 전통주 전문가 이대형 박사는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오크·바닐라·초콜릿 등 전형적인 위스키 향이 있지만 과하지 않다. 고도주인데도 부드럽다. 감칠맛이 더해져서 쌀이 가진 풍미와 맛이 잘 드러나므로 외국 위스키와 견줄 수 있는 ‘한국형 라이스 위스키’”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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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대상 우리 술, 당연히 쌀로!
―온라인 마켓이나 누리집 직거래 사이트에서 금세 동난다고 알고 있다. 언제부터 인기 실감했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회사 후배들이 한병씩 사면 양조장 몇 년은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웃음) 농담이다. 지명도가 생긴 계기는 2022년 한 매체가 여는 주류품평대회에서 쌀 소주 2종류와 쌀로 만든 보드카가 대상을 탔다. ‘이 술이 뭐지’ 하며 소문이 났고, 마신 이들이 에스엔에스(SNS)에 올리면서 주목받았다. 그저 맛을 평가받아보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우리 술맛을 객관화해서 회사의 가치를 정해보려 했다. 이후 나온 ‘마한 오크’가 수상한 술보다 더 주목받았다. 2년 전부터 보틀숍이나 업소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차별화한 맛의 비결은?
“공정을 단순화하고, 품질의 변화가 없게 하려 했다. 고두밥(증기로 찐 밥) 안 쓰고, 쌀을 튀긴 후 가루로 만든 것을 쓴다. 누룩도 만들지 않고 입국(한 종류의 균만을 쌀에 접종해 배양한 것)을 쓴다. 기후위기 시대에, 기후 조건에 따라 균의 종류나 생산량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다양한 효모를 시험해 보고 그중 하나를 골랐다. 가변성을 최대한 줄이려는 거다.”
―국내 농산물 중에 왜 쌀을 골랐나?
“외국인에게 우리 술 보여주려니, 우리 농산물은 당연하고, 밀이나 감자, 고구마, 수수 등은 엄청나게 만드는 데(외국 기업)가 많다. 원료 경쟁력도 따져 쌀로 정했다.”
―대표님만의 레시피를 만들었는데, 양조 공부는 어떻게 했나?
“‘수수보리아카데미’(경기대 부설 양조 교육기관)를 다녔고,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양조장 대표나 양조자를 에스엔에스나 이메일로 연락해 만났다. 30여분 된다. 그분들 답변이 도움됐고, ‘과학적 접근이 목표’란 결론에 도달했다. 시음회도 자주 열었는데, 피드백이 도움됐다. 다른 나라, 벤치마킹할 만한 술도 많이 마셨다.”
―걱정거리나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쌀이 남아돈다지만, (양조용으로 구입하는) 쌀값은 싸지 않다. 우리 농업 구조가 심각하다. 우리 주세법상 ‘위스키’라고 명명하려면 맥아가 들어가야 한다. 증류한 소주를 오크통에서 숙성한 술은 (식품 유형이) ‘소주’로 분류된다. 막걸리에 견줘 높은 세율도 걱정거리다.”
양조자 대부분이 선호하는 햅쌀은 비싼 편이다. 가격이 싼 정부미 혜택을 소규모 양조장은 누리긴 쉽지 않다. 곡물을 재료로 해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 숙성하면 위스키라 부른다. 미국 등에서 ‘마한 오크’가 생산되었다면, 위스키로 분류됐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외국인도 좋아하는 한국 술 만들자’ 그거 하나다. 올해 글로벌 회사 다니던 딸을 영입하면서 외국인도 참여할 만한 투어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다. 오는 7~8월이면 가능할 거 같다.”
소주 3병이 주량인 그. 20여년 넘게 직장생활 한 이답게 ‘술이 늘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두가지 키워드 ‘반도체’와 ‘양조’.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반도체 사업에 종사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는데, 돌파 능력이 생겼어요. 정신력이 커졌죠. 위스키를 통칭하는 ‘스피릿’도 뜻은 ‘정신’ ‘영혼’이잖아요. 둘은 다른 영역이지만 제겐 ‘정신력’이란 공통점이 있는 분야죠.”
마지막으로 ‘은퇴 후 인생’ 설계에 고민인 ‘후배 은퇴자들’에게 한마디 남겼다. “에너지가 있으면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시라. 종사했던 분야에서 일 찾으면 시작은 쉬울지 몰라도 큰 보람은 없습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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