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살롱] 유니콘, 맹렬하게 아름다운 그 이름

2024. 6. 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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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공존하는 존재로서의 유니콘
“블랙 유니콘은 가만있지 못한다.”
-오드리 로드, ‘블랙 유니콘’ 중

언젠가 "오빠는 유니콘이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좀 어색했지만 제법 귀엽게 들렸다. "이런 유니콘은 공공재로 풀어야 해"라는 말을 두 번째 들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널 닮은 보급형 유니콘을 당장 도입해야 해." 몇 번 반복해서 유니콘이라는 이름을 받아내다 보니 "유니콘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다. "현실 세계에는 없거든. 현실 세계에서는 만나 볼 수 없는 종의 남자라는 거지." 내가 떠올리는 유니콘이랑 너무 달랐다.


유니콘의 다른 이름

유니콘으로 종종 호명되는 내가 듣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사랑꾼"이라는 이름. 들을 때마다 낱말 조합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꾼, 으로서의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고 사기꾼, 사냥꾼과 친연성 높은 이름 같아서 그랬다. 맥락상 부담 없이 사용하는 이름이지만, 끊임없이 분투하며 애(愛)쓰는 사랑의 과정이 말끔하게 지워진 이름 같다. 또 “애처가”라는 이름. 들을 때마다 애처로움이 함께 전해진다. 맥락상 비아냥거림을 직감한다. "아들 바보"라거나 "팔불출" 이름도 듣는다. 어린이-반려자에 대한 애정과 황홀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면 손쉽게 바보가 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귀여운 별칭처럼 쓰이지만, 듣기에 썩 그리 유쾌하지 않다.

가부장적 문화에서 남성이 수행하는 사랑과 돌봄에 '유난한' 이름이 하나씩 붙는다. "성차별적 규범은 엄마든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역할에서든 사랑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벨 훅스)이지 남성의 의무로 부과되지 않아서일까? '꾼'이거나 '바보'와 같은 두드러지는 이름을 붙여 남성의 사랑과 돌봄이 뭔가 특별한 것,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가부장적 경계를 넘는 사랑의 행위를 자꾸 덜커덩거리게 만드는 이름들인 것 같다. 사랑꾼-애처가-아들바보-팔불출…. 그런데, 유니콘이라… 그러니까, 내가 느끼고 있는 유니콘이랑은 확실히 달랐다.


3,000년의 판타스틱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유니콘은 지난 3,000년 동안 인기를 끌었다. 용이나 인어와는 다르게 유니콘은 전설과 신화 속 동물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유니콘은 동방의 먼 이국에서 실제로 "봤다"고 이야기로 전해지는 '미지'의 동물이었다. 하얀 몸, 빨간 머리, 진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야생 당나귀로 묘사되기도 하고, 말의 몸통, 사슴의 머리, 멧돼지의 꼬리, 코끼리의 거대한 발, 길고 검은 뿔을 가진 황소로 묘사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유니콘은 강인한 수컷을 상징하는 이국적인 동물이었다. 사자, 코끼리와 겨루어도 거뜬한 유니콘은 그야말로 동물계 끝판왕이었다. 그래서, 유니콘은 종종 군대와 왕실을 대표하는 전령이자 문양으로 사자, 독수리와 함께 널리 활용되기도 했다.

독일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 'The Mystic Hunt of the Unicorn'(1489) 속 유니콘. 위키피디아

중세 기독교 사회에 들어서면서 강인한 유니콘은 ‘신성함과 순결함’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에덴동산의 '신성한' 동물 중 하나로 여기기도 했고, 처녀들에게만 곁을 내어주는 '순결한' 사랑의 은유를 전해 받았다. 12세기 들어서면서 유니콘은 기사도 문화와 함께 사냥감이 되었다. 남성 사냥꾼(기사)이 처녀들 곁에 노닐고 있는 유니콘을 은밀히 사냥하는 이야기와 작품들 속에서, 유니콘은 남편에 의해서 길들여져야 할 여성이라는 은유로 사냥당했다. 사냥을 통해 얻은 유니콘의 뿔은 남성 권력의 상징으로 도약했다.

중세의 유니콘이 성직자들과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면,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유니콘은 의사와 과학자들에게 실용적인 관심을 끌었다. 유니콘의 뿔은 1617년 연금술 협회에서 승인된 중요한 약리학적 재료였다. 유니콘 뿔을 빻은 가루는 성욕을 촉진하는 최음제, 유니콘의 간은 나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해독제, 유니콘 가죽으로 만든 벨트나 신발은 전염병을 예방한다고 믿었다. 유니콘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재료'로 쓰였다.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유니콘의 뿔이 아니라 외뿔고래의 뿔과 코끼리의 엄니, 코뿔소의 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학적 관심은 식어버렸지만,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다시금 번성한다.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유니콘을 개인적인 방식과 전통적인 방식을 뒤섞어 사용했다. 시인 릴케는 유니콘 이미지에 "수백 년 동안 사랑 전체를 감당해 온" 강렬한 여인들의 모습을 실었고, 작곡가 실비오 로드리게스는 혁명의 이상과 동지에 대한 사랑을 유니콘에 실어 노래로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 유니콘은 기업가치가 1조 원이 넘는 스타트업 기업, 양성애자 여성을 부르는 속어, 다정다감하며 세속적 지위가 확보된 남성을 부르는 별칭,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소녀들을 겨냥한 상당한 양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유니콘은 고정된 의미와 이미지에 정박하지 않고 판타스틱한 3,000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퀴어한 유니콘

성소수자인 우크라이나 군인은 우크라이나 국기와 함께 유니콘 패치를 달고 싸운다. NYT

그러니까, 3,000살이 넘은 유니콘은 강인함과 취약함, 거침과 보드라움, 신성과 세속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동물이다. 수컷성-처녀성-남성성-여성성-부성-모성이 뒤섞인 채로 누벼져 있다. 유니콘은 언제나 각 시대의 욕망과 권력 체제, 속마음들이 누벼진 하나의 누빔점(point de capiton)으로 출현했다.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며, 맥락 지어지고, 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랜스(trans)하고 퀴어하다. 그래서 그런지 유니콘은 성소수자들의 현장에 자주 출몰한다.

퀴어퍼레이드 현장에 가보면 각종 의상, 깃발, 소품, 쿠키, 굿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지개 유니콘이 곳곳에서 서식 중이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젠더 퀴어 군인들은 군복에도 ‘유니콘’ 패치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성별은 가상적이다(Gender is Imaginary)"라는 슬로건과 함께 유니콘이 배치되어 있는 그래픽디자인들이다. 그러니까, '가상의 동물' 유니콘의 뾰족한 뿔이 진짜여자/진짜남자를 정박시키는 진짜의 체제를 겨누고 있을 때 아이러니한 쾌감을 준다. 진짜와 가짜를 뒤섞고, 실재하는 가상과 가상적 실재를 알레고리로 엮어내는 유니콘은 그야말로 퀴어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유니콘의 존재 방식은 여기에 있다.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 되기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진 가장 강하고 풍부한 면모들을 내 안에, 내 속에 받아들여 지구가 언덕과 산봉우리를 품듯 내 몸에 골짜기와 산맥이 공존하기를 바랐다.”(오드리 로드)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 어머니와 아버지, 산맥과 골짜기를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느낌 속에서 유니콘을 느낀다.


무지개 유니콘을 만났다

무지개 유니콘. 위키피디아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니콘과 앨리스는 서로를 처음 마주한다. 유니콘에게는 실물 인간 어린이를 만난 것이 처음이었고, 앨리스 역시 전설 속 괴물인 줄로만 알았던 유니콘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서로 주고받던 사이, 유니콘은 앨리스에게 말한다. “그럼, 이제 우리 서로를 본 거니까 당신이 날 믿으면 나도 당신을 믿을게요.” 마법 같은 생명체와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것이다.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함께 결의된 믿음을 받침으로 하는 도약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싶은 거. 여성성과 남성성으로만 나뉠 수 없는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맹렬하면서도 달콤하고, 담대하면서도 예리한 특성들이 뒤섞인 채 공존하고 있는 유니콘이 저마다의 깊은 내면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 내가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진짜와 가짜로 아무리 나누어도 절대 길들여지지 않고 오롯이 싸워나가는 퀴어한 유니콘들이 세계의 감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것. 내가 믿고 있는 것. 이 견고한 세계를 뿔로 치받으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지개를 퍼 나르는 유니콘들에 의해 세계는 보다 알록달록해지고 있다는 거. 그리고 앨리스는 서로 믿어보자고 제안한 유니콘에게 대답한다. "네, 그럼요."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오드리 로드, ‘블랙 유니콘’ 중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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