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턴, U턴, J턴'…저마다 이유로 도시 떠나는 일본 사람들 [같은 일본, 다른 일본]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도시를 떠나는 일본인들, ‘I턴’, ‘U턴’, ‘J턴’
일본에서도 대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하는 것은 매력적인 삶의 옵션이다. 자연 환경이 좋아서,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위해, 도시의 인간관계에 지쳐서, 고향이 그리워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기거나, 혹은 도시와 지방 두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오가며 생활하는 ‘두 거점 라이프’를 실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많은 인구가 북적거리는 대도시의 주거 환경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또 재택근무, 원격 근무 등 출퇴근이 자유로운 ‘텔레워크’가 확산되면서 직장을 위해 대도시 생활을 고집할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직장에서 은퇴한 뒤 귀향하는 고령자의 이주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에는 30, 40대 비교적 젊은 세대가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향하는 사례가 더 많다고 한다.
나 역시 코로나 팬데믹 때에 도시를 떠나 시골에 이주했다. 일본의 대도시인 도쿄에서 경기 가평의 숲속 마을로 이주했으니, 나의 경우에는 국경도 넘었다. 코로나19 사태 때 예기치 않게(팬데믹 초기에 한동안 외국인은 일본에 입국할 수 없었다) 한국에 머물며 일본의 대학에서 강의, 연구하는 ‘텔레워커’가 됐다.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난리였지만 시골 생활은 자연이 가깝고 여유가 있어서 오히려 쾌적했다. 결국 그 경험이 대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로 완전히 이주하려는 마음을 부추겼다. 일본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시골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슬로 라이프’를 실험하는 중이다. 애로사항도 있지만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도쿄에서 도시의 삶을 ‘지겹도록’ 맛본 덕분인지,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골살이가 퍽 만족스럽다.
나처럼 도시에 살다가 연고가 없는 제3의 지역으로 이주하는 형태를 일본에서는 ‘I턴’이라고 부른다. 사실 I턴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 만큼 ‘턴(돌다, 돌아가다)’이라는 단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과거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이주하는 대부분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턴’이었던 만큼, 이런 이름이 붙어 버렸다. 도시를 떠나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는 지방 이주 형태는 ‘U턴’, 도시를 버리고 지방으로 이주하되 취직, 진학 등을 위해 고향과 가까운 도회지에 정착하는 것은 ‘J턴’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지방 이주가 성공적이지는 않다. 일단 지방에 이주했다가 어려움을 느끼고 다시 대도시로 돌아오는 ‘O턴’도 있다.
한편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이주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면서 ‘손주 턴’(일본어로는 ‘孫ターン’)이라는 말도 생겼다. 도시에서 어린 손주를 데리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 혹은 그 부근의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30, 40대의 젊은 부모가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조부모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주 턴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환경 속에서 육아하고 싶다’, ‘아이들이 스트레스가 적은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등 보다 적극적인 이유로 지방 이주를 결심하는 학부모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 딸이 유치원을 졸업할 즈음에 도쿄를 떠나기로 계획하고 준비 중인 지인도 있다. ‘딸이 자연환경 속에서 뛰어놀면서 크면 좋겠다’는 것이다. 입시 교육을 위해 소위 ‘학군이 좋다’는 대도시의 특정 지역을 선호하는 한국의 학부모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 ‘지역부흥협력대’, 지방 활성화와 지방 이주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일본도 도쿄와 수도권에 인구와 사회 인프라가 집중된 과밀 상태라는 점이 국가 과제로 인식된다. 사회적·경제적 인프라가 밀집한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하는 한편,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인구도 일자리도 감소한다는 위기감이 있다. 일본 정부가 2009년부터 10년 넘게 시행 중인 ‘지역부흥협력대(地域起こし協力隊)’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3년 동안 지방에 거주하면서 그 지역 활성화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참여자에게는 활동 경비 이외에 평균 20만 엔(약 200만 원)가량의 월급, 살 집, 자동차 등을 제공하기 때문에, 큰 불편 없이 지방에 거주하면서 활동을 벌일 수 있다. 임기가 끝난 뒤 그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에는 정착이나 창업에 필요한 비용도 지원해 준다. 한편으로는 소멸 위기에 빠진 지방 활성화에 힘을 보태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젊은이의 지방 이주를 북돋는 취지다. 지방 이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최근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참여자가 7,000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 제도를 통해 지방으로 성공적으로 이주한 친구가 있다. 도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뒤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마침 전직을 고려하던 중에 대학원 지인의 권유로 지역부흥협력대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3년 동안 도쿄에서 600㎞가량 떨어져 있는 아키타현, 그중에서도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에 거처를 뒀다. 그곳에서 마케팅, 컨설팅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그 마을의 조촐한 ‘아침 장(朝市)’을 지역 명물 이벤트로 재탄생시키는 등 마을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임기가 끝나갈 즈음에 그는 고향인 도쿄로 돌아올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친구는 도쿄에서도 소문난 부촌 출신으로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만끽하는 세련된 ‘차도녀’처럼 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의외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그는 지금 아키타시에 정착해서 그 지역 여성들의 창업과 재취업을 돕는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지역부흥협력대 활동이 만족스러운 'I턴'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실 나의 친구처럼 성공적인 사례는 드문 편일 것이다. 밝고 사교적인 그는 낯선 지역에서도 ‘핵인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공동체의 분위기에 고전하기도 하고, 지역 활성화 프로그램이 좋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혹은 나처럼) 대도시에서만 살아본 사람이 지방에 성공적으로 이주, 정착하는 사례는 꽤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 ‘정들면 고향’, 다양한 주거 환경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
일본 속담에 ‘살면 그곳이 수도(住めば都)’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정들면 고향’이라는 뉘앙스인데, 정을 붙이고 살면 어디나 대도시나 다름없이 편하고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여유로운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지만 “도시가 더 살기 좋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기에는 여전히 넘어야 하는 산이 많아 보인다. ‘학군지’, ‘역세권’, ‘부동산 유망지’, ‘재개발 지역’ 같은 얄팍한 개념이 살 곳을 정하는 기준이 된 상황도 안타깝다. 나처럼 드라마틱한 ‘도시 탈출’을 추천할 뜻은 없다. 다만 한 번쯤은 그런 사회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내가 정말 살고 싶은 곳은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문득 세상이 달리 보일지도 모르니.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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