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죽고, 뛰면 산다
제19회 아이언맨 70.3 하와이 대회…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하프코스
생명 위협 강풍 맞으며 자전거 역주… 하루키 ‘묘비명’ 되뇌며 달리기 골인
4년 전 후배 ‘꾐’에 빠져 ‘古鐵’ 생활…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올해 19회째를 맞은 철인 3종 대회 ‘아이언맨 70.3 하와이’가 1일(현지 시간)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 빅아일랜드의 코할라 해변가 페어몬트 오키드 리조트에서 열렸다. 하와이는 철인 3종(트라이애슬론) 경기 발상지다.
올해 환갑을 맞는 기자에게 이번 대회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참가다. 6년 전 위험 수위를 넘은 혈당 조절을 위해 시작한 수영에 푹 빠져 있던 기자가 회사 후배 ‘꼬임’에 넘어간 것이 4년 전이다. 자전거도 없는데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철인의 동네에 입문한 것이다. 기자는 ‘철린이(철인+어린이)’이자 ‘고철(古鐵·나이 든 철인에 대한 애칭)’인 셈이다.
● “진짜 강한 선수는 누구인가”
이번 대회 공식 명칭인 아이언맨 70.3 하와이에서 70.3은 무슨 의미일까.
철인 3종에는 세 코스가 있다. 먼저 올림픽 정식 종목인 표준 코스로 수영 1.5km, 자전거 40km, 달리기 10km를 겨룬다. 컷오프(중도 탈락) 시간은 3시간 30분이다. 다음은 아이언맨 코스(일명 킹·king 코스)로 수영 3.8km, 자전거 180.2km, 달리기 42.195km다. 보통 오전 7시에 시작해 밤 12시에 끝난다. 컷오프 시간은 17시간이다. 철인 3종 하는 사람들은 킹 코스를 컷오프 시간 내에 완주해야 진정한 아이언맨으로 쳐준다.
그리고 아이언맨 코스의 절반인 하프 코스가 있다. 수영 1.9km, 자전거 90.1km, 달리기 21km다. 3개 종목 거리를 마일(1마일은 약 1.61km)로 계산하면 70.3마일이 된다. 컷오프 시간도 17시간의 절반인 8시간 30분. 그러니까 이번 대회는 하프 코스다. 70.3 하와이는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70.3 대회 중 가장 어려운 코스로 알려져 있다.
기자와 한국에서 같이 참가한 선수는 대한민국 최고 철인클럽 ‘오클래스’ 코치이자 현역인 오영환 선수를 포함한 클럽 멤버 5명과 순천 철인클럽 소속 3명이다. 오 선수는 지난달 열린 대구 대회에서도 1위를 한 명실상부 챔피언이자 레전드다. 최연장자는 중등 교사로 퇴직한 ‘고철’ 이강세 선생(64)이었다. 이 선생은 대회 직전 현지 훈련에서 성게 가시가 25개나 박혀 퉁퉁 부은 발바닥을 밤새 식초에 담가 가시를 녹여내고 출전했다.
바람이 다소 강해 걱정됐다. 출발 직전 대회 측에서 “너울이 너무 심해 수영 거리를 1.9km에서 750m로 바꾼다”고 공지했다. 수영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던 터라 살짝 아쉬움이 드는 한편으로 완주 못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대회 직후 안 사실이지만 비슷한 시간 열렸던 전북 군산 킹 코스 대회에서 조류가 심했으나 주최 측이 강행하는 바람에 참가자 30%가 수영에서 컷오프 되고 심지어는 한 생명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대회 경험이 많은 70.3 하와이 주최 측이 현명한 것이었다.
수영은 반환점까지 산호초가 훤히 내려다보여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가 따로 없었다. 노랗고 파란 물고기와 바다거북이들이 함께 노는 광경을 보며 즐겁게 헤엄쳐서 골인하니 22분이 흘렀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와이는 원래 바람으로 악명 높지만 이 대회만 7번 참가한 오영환 선수 말로는 자신도 위험을 느낄 정도로 역대급 바람이었다. 몸 옆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자전거가 여러 번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다. 함께 참가한 동료들도 한결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기록은 필요 없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강 자전거도로였으면 3시간 남짓에 완주할 거리를 4시간 22분 만에 마쳤다. 자전거를 두는 바꿈터에 도착해 페달에서 슈즈를 빼는 순간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달리기는 대회장인 골프장 주변을 2바퀴 돈다. 직선 주로는 별로 없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하다. 페어웨이 한가운데에서는 모래사장을 뛰는 것처럼 힘이 들고 속도는 나지 않는다. 한 바퀴 돌고 나니 걷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문득 머릿속에 ‘무라카미 하루키/1949∼20××/작가(그리고 러너)/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마라톤 애호가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에서 미리 밝힌 자신의 묘비명이다. 이 묘비명을 생각하며 ‘걸으면 죽고, 뛰면 산다’고 주문처럼 외면서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뛰기 시작한 지 3시간이 약간 넘으니 저 앞으로 피니시 라인이 보였다. 출발한 지 8시간 7분. 뒤를 돌아보니 아직 많은 사람이 줄줄이 뛰어온다. 주먹을 불끈 쥐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진다. 많은 자원봉사자, 마을 주민, 선수 가족들이 끝까지 남아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준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들어오는 선수도 많다. 나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이 순간을 위해 철인 3종을 하는 것일까.
●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어’
이번 대회에서는 얼굴에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영을 마치고는 헬멧에 검정 고글을 끼고 자전거 페달을 밟은 뒤 땡볕에도 힘겹게 달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컷오프 시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연방 이마의 땀을 훔치며 출발 8시간 반이 넘어서도 달리는 모습을 보면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철인 3종을 오래한 사람들 말로는 4, 5년 전만 해도 60세 이상 참가자는 드물었고 여성은 손에 꼽을 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국내외 대회를 가리지 않고 고철 참가자가 늘고 여성도 급증하는 추세다. 아이언맨 코스 대회에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인 철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0일 필리핀에서 열린 ‘아이언맨 수비크’ 대회에서도 80세 노인이 완주했다. 철인 3종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운동’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인간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아이언맨 코스는 ‘누구도, 아무도’ 할 수 없고 오로지 ‘미친 자’만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닌가 싶다.
이번 대회 출전을 신청한 사람은 1500명이 넘었지만 완주자는 남녀 통틀어 973명이었다. 수영 자전거 달리기의 컷오프 시간을 맞추지 못한 DNF(Did Not Finish)와 아예 출발도 하지 못한 DNS(Did Not Start)가 500명이 넘는다. 기자 나이대인 남성 60~64세 완주자는 52명이었다. 이번 대회는 남녀를 구분해 다섯 살 간격으로 나눠 순위를 매겨 시상했다. 재작년 남성 40~44세에서 우승한 오 선수는 올해 2위에 올랐다. 전체 5위였다. 고철 이 선생도 발바닥 한쪽 부분이 시퍼렇게 되면서까지 완주해 철인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기자는 지난해 전남 구례에서 아이언맨 코스를 완주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 ‘힘든 짓’을 왜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주변에 ‘왜 철인 3종을 하느냐’고 자주 물어본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느끼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가 제일 많이 들은 대답이다. 철인 3종에는 자신도 모르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빅아일랜드(하와이)=김광현 기자 kkh@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