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복수극이 촌스러워지는 날
■
「 다시 불거진 밀양 여중생 사건
가해자·경찰·법원 모두 반성해야
‘사적 제재’ 당장은 통쾌해 보여도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
」
당시 나는 법대 학부생이라는 이유로 법이 왜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느냐는 볼멘소리를 자주 들었다. 피해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악몽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추가 보도가 잇따랐으니 말이다. 법을 전공하는 사람까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차분히 볼멘소리에 대응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줄곧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사건을 끝내는 게 최선이었는지 말이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콘텐트를 살펴보면 미성년 가해자의 범죄와 피해자의 복수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를 비롯해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 영웅’, 디즈니+의 ‘3인칭 복수’, 티빙의 ‘돼지의 왕’ 등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대중이 이런 소재를 다룬 콘텐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극적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피해자만 계속 피해자로 남는 사례를 목격하거나 경험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테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이미 종결된 지 오래된 사건이므로 가해자들을 다시 기소해 처벌할 수 없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는 형사소송법뿐만 아니라 헌법에도 명시된 형사사건 상의 원칙이다. 사이버 렉카의 가해자 폭로가 ‘사이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사적 제재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고려 경종 때 부모의 원수나 개인적 원한이 있는 상대를 죽여도 복수로 인정되면 처벌을 받지 않는 법이 시행된 바 있다. 저잣거리에서 느닷없이 누군가를 죽여도 복수라면 처벌받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고, 급기야 왕족까지 살해당하고 말았다. 복수법은 온갖 폐해만 남긴 채 1년 만에 시행 중지되며 우리 사법 역사에 제대로 흑역사를 남겼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진다. 그런데도 사이버 렉카의 가해자 폭로 같은 사적 제재가 횡행하는 이유는 국민의 뿌리 깊은 사법 불신에 있다고 본다. 돌이켜 보면 많은 게 아쉽다. 만약 사건 당시 가해자들이 죄의 무게에 비례한 처벌을 받고 진심으로 피해자에게 사과했다면, 오랜 세월이 흘러 조리돌림을 당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만약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진심으로 피해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면, 여론도 수사 결과가 아쉬워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만약 재판부가 가해자들의 범죄를 단순한 성적 호기심에 비롯된 우발적 범죄로 가볍게 보지 않고 계획된 중범죄였다고 판단했다면, 여론도 법원을 더 신뢰하지 않았을까.
나는 복수극이 ‘조폭물’처럼 촌스러운 콘텐트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복수극은 볼 땐 통쾌할지 몰라도 뒷맛은 쓰다. 복수극이 쏟아져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더욱이 피해자를 지옥에 둔 채 벌이는 폭로전은 의미가 없다. 피해자 측은 2차 피해를 호소하며 사이버 렉카에 영상 삭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인데도 가장 소외돼 있다. 자유는 방종과 다르고 그 뒤에 책임이 따른다는 걸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면 복수극은 철 지난 과일 취급을 받지 않을까.
정진영 소설가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