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에서는 지금 ‘밤 끝으로 여행’ 전시회 중이다. 미국 사진 거장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의 대표작 흑백사진 ‘누드(카리스, 산타모니카)’(1936)를 볼 수 있다. 누드임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하기보다 인간의 몸이 갖는 뜻밖의 기하학적, 조형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프랑스현대사진’ 전에서 이것과 매우 닮은 흑백사진 작품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데 볼수록 그로테스크하다. 여성 모델의 신체 비례는 이상하며 관절은 울퉁불퉁하고 손가락은 여섯 개다. 사실 이 작품은 프랑스 동시대 작가들인 브로드벡과 드 바르뷔아가 생성 인공지능(AI) ‘미드저니’에게 웨스턴의 ‘누드’를 묘사하는 프롬프트(일종의 명령어)를 넣어 생성한 것이다.
또 다른 거장 만 레이(1890-1976)의 전설적인 작품 ‘눈물’을 AI가 생성한 작품도 옆에 걸려 있다. 이 AI 결과물은 좀더 자연스럽지만 만 레이 원작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느낌, 즉 평범한 사물 두 개를 뜻밖의 방식으로 결합해서 나오는 낯선 느낌은 살아나지 않는다.“이 작가들은 AI로 하여금 사진 역사를 재현하게 하면서 표절 문제, 미학적 빈곤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고 전시의 기획자인 엠마뉘엘 드 레코테가 지난 달 서울 간담회에서 설명했다.그는 퐁피두 센터와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사진 전문 큐레이터를 역임하고, 현재는 파리 사진 축제 ‘포토 데이즈’의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지금 서울은 사진전 풍년이다. 이 사진전들을 함께 보면 20~21세기 사진의 역사와 진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밤 끝으로의 여행(8월 25일까지)’의 경우, 밤과 밤이 상징하는 무의식과 꿈, 죽음 등을 주제로 한 사진들을 한 자리에 모았는데, 내로라 하는 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이 많다. 이 전시를 본 후 ‘프랑스현대사진’ 전(8월 18일까지)을 보면 21세기 동시대 작가들이 20세기 거장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고 극복했는지 볼 수 있다.
뮤지엄한미의 20세기 거장들 사진을 보면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가 많다. 주제를 사실적이고 조작되지 않은 방식으로 재현하는 사진이다. 스트레이트 포토의 대표 작가 중에 앞서 나온 웨스턴과 미국 풍경사진의 대가 앤설 애덤스(1902~1984)가 있는데 이번 전시에 그의 이례적인 대형 작품 ‘멕시코 헤르난데스의 월출’(1941)이 나왔다. 폴라로이드 사 로비에 걸려있다가 회사가 파산한 후 경매에 부쳐진 것을 뮤지엄한미가 구입한 것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고가의 작품 중 하나다. 전시작 100여 점 중 뮤지엄한미 소장품은 66점에 달한다.
물론 전시는 밤이 상징하는 무의식도 다루고 있으므로, 스트레이트 포토와 대조적으로 다중 노출, 콜라주, 사진 위에 덧그리기 등을 통해 꿈과 무의식의 이미지를 만드는 초현실주의 사진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진 중에는 만 레이와 브라사이(1899~1984), 빌 브란트(1904~1983) 등의 작품이 있다. 전시에는 그 외에 한국의 주요 사진작가인 구본창의 초기 흑백 거리사진과 다큐멘터리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자나 브리스키의 곤충 포토그램(카메라 없이 직접 빛에 민감한 용지 위에 물체를 놓고 빛을 노출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 등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성곡미술관의 ‘프랑스현대사진’은 스트레이트 포토가 많지 않으며, 대신 여러 고전적 기술과 신기술을 섞어 제작한, 마치 회화와 같은 느낌이 나는 사진이 많다. 환상적인 색채의 풍경사진인 레티지아 르 퓌르의 ‘신화’ 연작, 고즈넉한 장소에 방치된 사물을 목탄으로 그린 것 같은 장-미셸 포케의 ‘무제’ 연작, 마치 옛 식물 세밀화나 아르누보 판화 같은 느낌을 주는 플로르의 ‘외젠 D의 정원’ 연작,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같은 베로니크 엘레나의 ‘정물’ 연작 등이 그 예다.
하이라이트는 유명 작가 로랑 그라소의 영상 ‘인공’이다. 눈 덮인 극지방의 구멍에서 높은 탑 같은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숲 풍경이 펼쳐지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밀한 세부까지 보이는 등,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는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사실 모두 가상의 장면으로, 작가는 사람들이 직접 여행하며 육안으로 보기보다 드론 영상 등으로 세상을 보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공과 자연 사이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2021년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프랑스 밖에서 보여지는 것은 성곡미술관이 처음이라고 이수균 부관장이 밝혔다.
1839년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입이 나온 프랑스는 사진의 종주국이라 불린다. 그러나 사진 경매시장에서는 그간 독일 뒤셀도르프 학파의 사진들이 프랑스 사진들보다 강세였던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묻자, ‘프랑스현대사진’을 기획한 드 레코테 디렉터는 “그것은 뒤셀도르프 학파의 사진들이 엄청나게 대형 포맷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뒤셀도르프 학파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인 칸디다 회퍼(80)의 개인전이 7월 28일까지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회퍼는 도서관·미술관·극장 실내를 사람 없는 텅 빈 상태로 찍은 사진으로 유명하다. 즉 인간의 문화가 집적된 공간을 인간 없이 촬영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우회적으로, 상징적으로, 지각하게 한다.이번 전시에서는 팬데믹 기간에 리노베이션 중이었던 건축물, 그리고 과거에 작업한 장소를 재방문하여 작업한 신작 14점을 선보인다.
한편 서울 강남 플랫폼엘에서는 한국의 주요 사진작가이자 개념미술가인 천경우의 개인전 ‘경청자들’을 23일까지 열고 있다. 사진, 영상, 관객 참여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된다. 관람객이 새소리를 들으며 각자의 말을 경청해 주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새를 그리는 작품, 관람객이 지인에게 즉석에서 셀카를 받아 그 얼굴를 점토로 빚는 작품 등 작가가 일반인과 협업하는 작업이 많다. AI와 디지털의 시대에 인간의 감각과 그 교류의 중요성을 되돌아보는 전시라서, 성곡미술관 ‘프랑스현대사진’전에 나온 화두들과 함께 생각해볼 만하다.
모처럼 풍부한 사진전들을 함께 봄으로써 사진의 역사를 대략 파악하고 AI 시대 사진의 새로운 도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