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집안 김용철, 온수리교회 스테인드글라스 만들어
예술가와 친구들
대광중 시절에는 원예반 활동을 했다.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김기창의 아들 김완, 임군홍의 아들 임덕진, 홍종명의 아들 홍순효, 홍일표의 아들 홍성근 등 화가의 아들이 많았다. 1990년대 후반 김용철의 개인전 때 임덕진이 찾아와서 ‘엄마’라는 제목의 소품을 하나 샀다. 그는 부친이 전쟁 때 북한으로 간 화가 임군홍이란 걸 밝혔다. 이후로 둘은 친해졌다.
미술반 후배 마광수, 그림보다 문학 열중
미술반의 두 해 후배로 마광수와 송윤희가 있었다. 송윤희는 그림을 꾸준하게 그려 홍익대에 진학했는데 마광수는 미술실을 들락날락하며 그림을 건성건성 그렸다. 마광수는 그림보다는 문학에 더 열중했다. 2017년 마광수가 죽었을 때 김용철은 붉은 장미 100송이를 사다가 순천향병원 영안실에 올렸다.
김용철은 3학년 방학 때 잠시 남대문시장에 있는 향린미술학원을 다녔다. 대광중학교 다닐 때 미술교사였던 이명의가 차린 학원이다. 마침 홍종명도 향린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향린의 1년 선배로 서울미대생인 황창배가 있었다.
숭의여전에는 고교 은사인 홍종명이 학과장으로 있었다. 홍종명은 선배인 박고석을 강사로 초청했다. 1974년 박고석이 비운 강사 자리를 김용철이 맡았다. 김용철은 1978년에 숭의여전 교수가 되었다. 남산의 숭의여전에서 퍼시픽호텔을 향해 내려오면 퇴계로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큰길가에 가수 최헌(1948~2012)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가수 이은하가 가끔 놀러 왔다. 최헌은 김용철의 대광고 동기다. 고교생 때는 서로 몰랐는데, 숭의여전 시절 이후로는 퇴근길에 레코드 가게에 들러 최헌을 만났다. 미아리 극장주인 아들답게 시원시원했다. 최헌이 죽자 동기들이 힘을 모아 대광고 교정에 노래비를 세웠다. 김용철이 디자인을 맡았다. ‘가을비 우산 속’의 가사와 최헌의 얼굴을 새겼다.
박고석, 홍종명이 가는 곳을 김용철은 따라다녔다. 개고기를 파는 원남동 할머니집, 순대국이 일품인 회현동 철산집은 물론이고 설악산 등산까지 따라갔다. 부인이 미국으로 가자 박고석은 원남동 건물 5층 꼭대기 화실에서 혼자 생활했다. 화실에 칸막이를 치고 좁다랗게 침실을 만들었다. 침실 벽은 온통 새카맣게 칠했다. 자리에 누우면 건너편에 걸린 이중섭의 사진이 보였다. 남의 담뱃불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화랑에서 그림을 원하는대도 박고석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서 버텼다. 박고석에게서 경제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고귀함을 배웠다.
김용철의 집안은 성공회와 관련이 깊다.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1898년에는 온수리에 성공회가 진출했는데 처음에는 교회라 할 만한 건물이 없었다. 김용철의 할아버지뻘인 김영지는 소아마비를 앓았는데 교인이 되었다. 1906년 김영지 할아버지가 기증한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가 좁아 김용철의 7촌 아저씨가 논을 기증하여 2004년 성베드로 신축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서울교구장을 한 바 있는 김성수 주교 역시 김용철의 7촌 아저씨다.
김용철은 길상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온수리 교회의 복사를 했다. 촛대복사는 어린이도 할 수 있었으나 향복사는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는데, 김용철은 향복사를 맡았다. 향을 피워 제대, 신부, 신자에게 연기를 보내었다. 신부는 김영선 큰할아버지였다.
훤칠한 인물에 삼성 갤럭시 시계 모델도
김용철은 키가 크고 인물이 훤하다. 1987년, 삼성이 생산한 갤럭시 시계의 모델로 발탁되었다. 바티칸 성당의 벽화를 실제로 가서 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NG를 딱 한 번 내고 촬영을 마쳤다. 스틸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따로 찍었다. 그랬더니 모델료 300만원이 들어왔다. 꽤 큰 돈이었다. 그 돈으로 고교 친구 부부를 초대하여 본인 부부와 함께 4박 5일 동안 오키나와 여행을 갔다. 인물 덕을 보았다.
김용철은 주변 사람들에게 후덕하다. 대학을 떠난지 오래인데도, 일 년에 두 번은 꼭 후배, 제자들과 함께 파티를 연다. 부지런하게 후배들의 전시장을 찾아 격려해준다. 강화 온수리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도 여전하다. 온수리 작업실의 텃밭에는 화초도 키우고 닭도 키운다. 매실이 열리면 술을 담그고 달걀이 모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의 최근작은 민화처럼 소박하고 건강하다. 그의 삶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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