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집안 김용철, 온수리교회 스테인드글라스 만들어

2024. 6. 1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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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김용철, 1976년 온수리 작업실에서. [사진 김용철]
화가 김용철(1949~)은 강화도 온수리 토박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본향인 강화도 온수리에서 자랐다. 여전히 작업실은 온수리에 있다. 지금은 강화도에 엄청난 숫자의 차량이 오간다. 다리가 없던 과거에는 육지와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김용철은 온수리의 길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의 대광중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로 가는 길은 멀었다. 우선 온수리에서 십리 떨어진 초지항까지 걸어가야 한다. 초지항에서 인천 연안부두로 가는 배는 물때를 맞추어야 했기에 출항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한강과 임진강에서 흘러온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꽝꽝 큰소리를 내며 선체를 쳤다. 연안부두에 내린 소년 김용철은 인천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갔다. 서울역에서는 전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는 버스를 타고 종암동 집에 도착했다. 부친은 강화도 온수리에 살고 모친은 자식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종암동에 따로 집을 구해 살았다. 온수리에서 서울의 집까지 가는 데에 하루가 걸렸다.

대광중 시절에는 원예반 활동을 했다.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김기창의 아들 김완, 임군홍의 아들 임덕진, 홍종명의 아들 홍순효, 홍일표의 아들 홍성근 등 화가의 아들이 많았다. 1990년대 후반 김용철의 개인전 때 임덕진이 찾아와서 ‘엄마’라는 제목의 소품을 하나 샀다. 그는 부친이 전쟁 때 북한으로 간 화가 임군홍이란 걸 밝혔다. 이후로 둘은 친해졌다.

미술반 후배 마광수, 그림보다 문학 열중

김용철이 제작한 강화도 온수리 성공회 성베드로 성당 본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2007). [사진 김용철]
미술반은 화가 홍종명(1922~2004)이 지도했다. 미술실이 따로 있었는데 수업준비실인 옆방은 사실상 홍종명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홍종명의 작업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홍종명은 매년 4월 5일, 식목일이 오면 학생들을 데리고 우이동 다락원으로 갔다. 명분이 사생인지라 화판은 들고 갔지만, 그림은 안 그리고 산기슭에 터를 잡아 밥해 먹고 노는 일이 전부였다. 미술반에는 동기로 장계현이 있었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친구였다.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는데 나중에 가수가 되었다.

미술반의 두 해 후배로 마광수와 송윤희가 있었다. 송윤희는 그림을 꾸준하게 그려 홍익대에 진학했는데 마광수는 미술실을 들락날락하며 그림을 건성건성 그렸다. 마광수는 그림보다는 문학에 더 열중했다. 2017년 마광수가 죽었을 때 김용철은 붉은 장미 100송이를 사다가 순천향병원 영안실에 올렸다.

김용철은 3학년 방학 때 잠시 남대문시장에 있는 향린미술학원을 다녔다. 대광중학교 다닐 때 미술교사였던 이명의가 차린 학원이다. 마침 홍종명도 향린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향린의 1년 선배로 서울미대생인 황창배가 있었다.

왼쪽부터 주태석, 송윤희, 김용철, 마광수. [사진 김용철]
홍익대의 동기로는 이완호, 백순공, 박철, 유병엽 그리고 연극을 한다고 한해 꿀린 선배 신성희가 있었다. 3학년이 되면 자신을 지도할 교수를 정해야 한다. 유럽식의 도제식 교육방식이 잠시 홍익대에서 실행되었다. 여학생들은 남관을 선호했다. 김용철은 4학년생들과 함께 유영국의 실기실에서 지도를 받았다. 대학 4학년인 1970년 12월 김웅배, 박철, 신성희, 이완호 등과 함께 Group-X를 결성하여 문화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김용철은 사진과 페인팅을 결합한 포토 페인팅의 작업을 내놓았다. 포토 페인팅 작업은 1982년까지 지속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화가 이대원, 평론가 이일과 가까워졌다.

숭의여전에는 고교 은사인 홍종명이 학과장으로 있었다. 홍종명은 선배인 박고석을 강사로 초청했다. 1974년 박고석이 비운 강사 자리를 김용철이 맡았다. 김용철은 1978년에 숭의여전 교수가 되었다. 남산의 숭의여전에서 퍼시픽호텔을 향해 내려오면 퇴계로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큰길가에 가수 최헌(1948~2012)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가수 이은하가 가끔 놀러 왔다. 최헌은 김용철의 대광고 동기다. 고교생 때는 서로 몰랐는데, 숭의여전 시절 이후로는 퇴근길에 레코드 가게에 들러 최헌을 만났다. 미아리 극장주인 아들답게 시원시원했다. 최헌이 죽자 동기들이 힘을 모아 대광고 교정에 노래비를 세웠다. 김용철이 디자인을 맡았다. ‘가을비 우산 속’의 가사와 최헌의 얼굴을 새겼다.

박고석, 홍종명이 가는 곳을 김용철은 따라다녔다. 개고기를 파는 원남동 할머니집, 순대국이 일품인 회현동 철산집은 물론이고 설악산 등산까지 따라갔다. 부인이 미국으로 가자 박고석은 원남동 건물 5층 꼭대기 화실에서 혼자 생활했다. 화실에 칸막이를 치고 좁다랗게 침실을 만들었다. 침실 벽은 온통 새카맣게 칠했다. 자리에 누우면 건너편에 걸린 이중섭의 사진이 보였다. 남의 담뱃불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화랑에서 그림을 원하는대도 박고석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서 버텼다. 박고석에게서 경제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고귀함을 배웠다.

김용철의 집안은 성공회와 관련이 깊다.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1898년에는 온수리에 성공회가 진출했는데 처음에는 교회라 할 만한 건물이 없었다. 김용철의 할아버지뻘인 김영지는 소아마비를 앓았는데 교인이 되었다. 1906년 김영지 할아버지가 기증한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가 좁아 김용철의 7촌 아저씨가 논을 기증하여 2004년 성베드로 신축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서울교구장을 한 바 있는 김성수 주교 역시 김용철의 7촌 아저씨다.

김용철은 길상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온수리 교회의 복사를 했다. 촛대복사는 어린이도 할 수 있었으나 향복사는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는데, 김용철은 향복사를 맡았다. 향을 피워 제대, 신부, 신자에게 연기를 보내었다. 신부는 김영선 큰할아버지였다.

훤칠한 인물에 삼성 갤럭시 시계 모델도

최근작 ‘모란이 활짝 핀 날, 좋아요’(2023). [사진 김용철]
김용철은 1991년에 홍익대 교수로 부임했다. 2003년 프랑스 낭시에 갔다. 낭시 유리학교에는 홍익대 제자 감성원이 있었다. 낭시에서 감성원과 함께 스테인드글라스 1장을 제작했다. 이를 분해하여 온수리로 가져 왔다. 2004년 여름방학 때 감성원과 함께 프랑스의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자가 온수리로 와서 김용철의 화실 2층에 기숙했다. 여기에 김용철, 감성원 그리고 홍대제자들이 힘을 합쳐 신축성당 종루에 들어갈 여덟 개 창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공동제작을 시작했다. 한 달 후 프랑스 기술자가 귀국할 때는 한 장이 제작되었다. 남은 사람들이 6개월간 나머지 일곱 장을 완성했다. 2007년부터 온수리교회 본당 회랑 스무 개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시작하여 일 년 만에 완성했다. 대학로의 성베다 교회는 1970년대에 서울시내 대학생들에게 다양한 서클 모임을, 근로자에게는 야학 공간을 제공한 곳이다. 성베다 교회는 2007년 대학로교회로 개명하여 재건축 축성식을 가졌는데 5층 성당의 4면 벽면 전체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김용철이 맡았다.

김용철은 키가 크고 인물이 훤하다. 1987년, 삼성이 생산한 갤럭시 시계의 모델로 발탁되었다. 바티칸 성당의 벽화를 실제로 가서 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NG를 딱 한 번 내고 촬영을 마쳤다. 스틸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따로 찍었다. 그랬더니 모델료 300만원이 들어왔다. 꽤 큰 돈이었다. 그 돈으로 고교 친구 부부를 초대하여 본인 부부와 함께 4박 5일 동안 오키나와 여행을 갔다. 인물 덕을 보았다.

김용철은 주변 사람들에게 후덕하다. 대학을 떠난지 오래인데도, 일 년에 두 번은 꼭 후배, 제자들과 함께 파티를 연다. 부지런하게 후배들의 전시장을 찾아 격려해준다. 강화 온수리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도 여전하다. 온수리 작업실의 텃밭에는 화초도 키우고 닭도 키운다. 매실이 열리면 술을 담그고 달걀이 모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의 최근작은 민화처럼 소박하고 건강하다. 그의 삶도 그렇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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